이런 놈들이 좀 어이없다.
메신저로 한 참 인터넷 쇼핑 이야기하다가, 컴퓨터를 끄고 다른 곳에서 가서 접속했더니 메일이 와있다.
제목 "읽어봐라..."다.
풀어쓰면 "요거 쓸만하다. 너 한테도 피가되고 살이 될 주옥같은 글이다."
처음 쓰윽 읽었더니 그럴 듯하다.
제법 언어학자분 하시고, 들뢰즈 냄새도 좀 나시고, 하여 먹물 향기도 그윽하고,
"문화평론가"로서 "젠 체"도 나름 독자를 압박하는 그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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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디토/
주제; 나쁜 명사(名詞)
* 발문/ ‘경찰력 투입’을 ‘공권력 투입’, ‘사회지배층’을 ‘사회지도층’으
로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경제적 사실을 미학적 가치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경우이다. 좋은 명사의 나쁜 사용, 사실을 당위로 돌려놓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 위계화의 욕망이란 좋은 명사에 무임승차하고 나쁜 명사를 남에게 돌려놓고자 하는 지배의 기술일 뿐이다.
남재일/ 문화평론가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인디언의 이름은 독특하다. 추장은 ‘머리 속의 바람’, 제사장은 ‘새 걷어차기’, 백인 남자와 결혼하는 여성은 ‘주먹 쥐고 일어서’이다. 이름에는 새로 태어난 생명의 미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 ‘머리 속의 바람’은 평원의 고단한 삶을 이끌어가는 부족장에게 요구되는 지혜, ‘새 걷어차기’는 날아가는 새도 이단옆차기로 떨어뜨리는 제사장의 신통력, ‘주먹 쥐고 일어서’는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소속돼야 부족에 잔류할 수 있는 인디언 여자에게 요구되는 질긴 생명력을 염원하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자연친화적이고 시적인 작명법인데, 영화를 볼 당시는 왜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인디언의 이름은 사람의 동작이나 자연의 한순간적 상태를 묘사한다. 이건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가정한다. 삶도 순간성의 사건이다. 이들의 이름은 기꺼이 자연의 한순간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한다. 이런 작명법은 무엇이 되고자 기원하는 자동사형이다. 우리의 작명 관습은 무엇을 갖고자 하는 타동사형에 기초해 있다. 염원의 대상은 명사의 형태로 제시된다. ‘정숙(貞淑)이’는 단정하고 맑은 여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인데, ‘정숙’(貞淑)이란 추상명사를 목적어로 두고 이 상태를 염원한다. 그런데 정숙(貞淑)은 자연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적 가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숙을 욕망할 순 있지만 정숙이라는 존재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작명관습은 가치라는 관념을 추상명사 형태로 축적한 문명화된 사회의 일반적 행태다. 아예 추상명사가 부족한 원시 부족한테 자동사형의 작명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니 인디언 이름에 대해 터져나오는 반사적인 웃음은 사실은 명사형을 욕망하는 현대인이 동사형으로 행동하는 고대인에게 보내는 야유일 터이다. 발달된 사회일수록 명사가 풍부하다. 삶의 모든 경험과 정신적 생산물들이 결국은 명사라는 창고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고에 이런저런 물건을 쌓아놓다보면 그중에 불량품도 있게 마련이다. 정신의 창고를 좀먹는 나쁜 명사 중에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된 말만 꼽아봐도 ‘전과자’, ‘이혼녀’, ‘지방대 출신’, ‘코시안’(한국인과 아시아인의 혼혈), ‘편모’ 등 숱하다. 이런 유형의 명사는 과
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현재의 속성으로 고정시켜 하나의 범주를 만든다. 범주화의 동기도 처음부터 위계화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이혼녀’라는 명사가 별도로 범주화되는 것은 노처녀나 유부녀와 구별하고자 하는 위계화의 욕망 때문이다. ‘지방대’, ‘코시안’, ‘편모’ 등도 비주류로 총칭해 배제하고자 한 욕망에서 발생한 범주들이다. 소통의 효율을 위해 이런 말들이 불가피한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경우도 위계화의 욕망이 없다면 얼마든지 다른 표현으로 대체 가능하다.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나쁜 명사는 그 안에 포함되기를 다들 꺼린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소유권을 주장하는 명사도 있다. 돈 좀 있고 자리 높고 발언권있는 ‘사회지배층’을 언론은 종종 ‘사회지도층’이란 작위로 부른다.
노사분규현장에 경찰이 투입되면 언론은 ‘공권력 투입’이란 제목을 애용한다. 공권력은 행사되는 추상적 힘이지 투입되는 물리적 힘이 아니다. ‘경찰력 투입’을 ‘공권력 투입’, ‘사회지배층’을 ‘사회지도층’으로 표현 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경제적 사실을 미학적 가치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경우이다. 좋은 명사의 나쁜 사용, 사실을 당위로 돌려놓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위계화의 욕망이란 좋은 명사에 무임승차하고 나쁜 명사를 남에게 돌려놓고자 하는 지배의 기술일 뿐이다.
종종 파괴적인 것은 창의적이다.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찬 나쁜 명사들을 파괴하는 것, 범주화와 위계화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 그건 명사로 규정하지 않고 인디언처럼 복합동사로 오래 움직임을 지켜보거나 움직임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 한다. 이 창의성의 명명을 인디언 식으로 하면, ‘나쁜 명사 깨고 복합동사와 춤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창의성은 수시로 포장지를 갈아치우는 기술이 아니라 포장지를 찢어발기는 파괴적인 계보학적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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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시한번 생각해 보니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귀차니즘의 화신이 왜 이런걸 손수 포워딩을 했을까 생각을 하니 슬슬 짜증도 나기 시작한다.
인류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남재일씨의 논지는 Spir-Whorf Thesis 라고 불리우는 오래된 정리에 기반하고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 언어 사용 운동을 전개했던 미국의 한 "계몽"운동과도 닿아 있다. 뭐 한국에도 "바른말 고운말" 운동도 없지는 않다.
사족이지만, 나 "국민학교" 다닐때 매일 종례 때 욕한 사람 고발 시간이 있었다. 욕했다고 걸리면, 벌점을 받고, 자기가 한 욕을 열번 남들 앞에서 복창했어야했고, 잘 기억은 안나지만 매도 좀 맞았던가? 어쨌든 체벌이 있었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 당시에도 많은 나쁜 말이 있었음에도 (예를들어 좆만아, 씨발, 개보지, 호로새끼등등) 보고가 된 것은 "새끼야" "염병" "자식"등등 아주 순화된 것들이었다. 애들이 착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이 자식아"를 대체 욕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나쁜말로 판결이 났는데, 언어적으로 보자면 이처럼 나쁜말의 기준은 발화자와 청자의 감정적 상태를 기준으로 하기도 한다. "이 자식아"는 나쁜 감정적 상태의 표현이고 "듣는 자식 기분나쁘기" 때문에 욕이 되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평론가 남씨"가 어쨌든 정치와 미학의 문제까지 두루 한국어를 통해 다루고 있으므로 이야기해보자면, 가장 처절했던 "언어투쟁"의 역사로 노동절 쟁취투쟁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있다.
"근로자"라는 말을 버리고 "노동자"라는 말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야했는지 이제 기억하려는 사람도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사람도 이젠 없어져 가고 있는 듯 하다.
"위안부"라는 말은 또 어떤가?
그런데 그래도 남씨의 논지는 불편하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나쁜 명사들의 효과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안하는 바, 복합동사로 "파괴적 창조성"을 그려보기엔 언어적 경제성이라는 문제도 만만치 않다. 솔직히 그가 말하는 복합동사가 뭐 그리 대단한 기획까지 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그가 말한 공권력과 경찰력의 구분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반드시 그가 말하는 효과를 생산해내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저항의 측면에서 보면 공권력이라는 추상명사가 경찰력이라는 구체화를 통해서만 해체가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경찰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것을 경험한다. 어떤 경찰력의 사용은 공권력의 잘 못된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비판당한다.
시위현장에서 파업현장에서 시민과 노동자들은 경찰력과 "맞짱"을 뜨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잘못된 사용과 맞서는 것이고 실상 전선은 그 선에서 형성되고 정치는 또 그 자리에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한 언어의 사용에 대한 강조는 사태의 "객관적" 파악이라는 신화속에서만 그 유용성이 발견될 뿐이다.
문제는 정확한 언어라는 것은 없는 것이며 당파적 언어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짭새가 들이 닥쳤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꼭 반드시 경찰이 들이 닥쳤다고 써야하나 이럴 때도?
기자들은 이런 경우에 "경찰"로 번역을 하기도 하지만. 내 경우엔 이런 번역기의 작동이 문제다. 언어가 문제라기 보다는.
좀 더 직접적으로 좋고 나쁜것의 이분법적 사고는 그 자체가 이미 억압적이다.
그런 언어가 이미 존재하다기 보다는 어떤 "용례"가 나쁜 효과를 만들어낸다.
걸레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자. 걸레도 명사다. 다시 말해 사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걸레라는 말을 사람에게 사용할 때 그것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된다.
이렇게 언어라는 기표가 가지는 환유가능성 때문에 언어는 "정확도"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뉴욕보고 아무도 사과를 떠올리지는 않지만, 빅 애플은 뉴욕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는 미국을 보라.
남씨 아저씨가 사용한 아메리칸 인디안 (요것은 정말 나쁜 표현이다. 심지어는 미국이나 아메리칸도 빼먹었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인도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붙인 "명사"아닌가? 의도적 오인이 더 문제적인 것 아니겠는가? ) 사례도 추상명사가 없다고 하지만, 환유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지를 통한 용감함은 가끔 부럽다.
발전된 나라엔 명사가 많다는 사전학자류의 일반화론에 이르면 이글은 사실 좋은 글인체 하는 나쁜글이기까지 하다. 남씨 방식으로 말하면 한글은 상대적으로 아주 저급한 언어다 그 자체로서. 한국은 저발달된 나라고. 한글은 명사보단 형용사가 발달했고, 동사군은 민망하리만치 빈약하기까지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신조어군을 좀 살펴봐라. "장애우"라는 표현은 "애자"랑 링에서 그나마 혼전을 보이는 듯 했었으나, 그 자체로서도 문제적이까지 했지 않은가? 한편 작명 컨테스트의 작품이었던 콘돔의 한글명 "애필"은 또 얼마나 코믹했나?
독일철학(근대 서구철학의 근간을 이루는)에서 Sein 동사가 가지는 근본적 권위를 생각해보면 명사가 없다고 덜 발전한 국가라는 일반화는 언어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설명이 안된다. 오히려 동사군에 세계관은 더 많이 반영되기도 한다.
명사에 대한 패티쉬는 단지 상업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물동량" 수준에서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논지다.
선언적 포장지 찢기가 감동적인 언사이긴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럴싸한 "장바구니"의 고안과 개인 휴대성을 제고하는 문제 아니겠는가?
삐딱해지기 시작하니까 한도끝도 없고, 머리가 아파서 더 못 쓰겠다.
제발 논술시험 준비하는 우리내 아이들은 이글을 읽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말 빨과 글 빨을 내세우는 문화평론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냉정하게 남씨 아저씨에게 말하자면,
그런 "평론"의 계보학을 찢어발개는 노력이 더 필요하신게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유토디토는 무슨 외계어인가? 개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