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9일 금요일

Tulum - 마야 유적지 뚤룸 #2

Tulúm 마야 유적지 사진을 정리하기로 했던 것이 몇주전인데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이제서야 정리를 한다.

사진을 찍을 때 왜 찍는지 무슨 목적인지는 좀 명확히 하고 찍었어야 했는데, 거의 모든 사진이 카메라와 렌즈 테스트 수준에서 무작정 눌러댄 것이라 어디가 어딘지 몇몇 대표적인 유적을 제외하고는 짜맞춰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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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lum 지도: 출처 - http://www.frommers.com/images/destinations/maps/jpg/945_tulumruins.jpg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중앙에 있는 통로를 굳이 마다하고, 매표소를 돌아 북쪽으로 걸어가서,
북서쪽 집 근처에 나있는 샛길로 들어갔다가 중앙을 관통하고 "바다의 신전"이라는 곳을 지나 뚤룸의 대표적 유적인 El Castillo 와 "바람의 신전"쪽으로 갔었던 것 같다.
남아있는 유적들이 대개 그쪽에 밀집해 있으니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듯.

뚤룸의 유적은 다른 멕시코 유적지들과 비교하면, 바다에 면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빼어난 건축미와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약 600여전 전 건축물이라니 숭례문 정도의 연륜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할까?

다만 쿠바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고, 따라서 그 옛날 이곳에 살았던 마야인들은 쿠바와의 무역과 카리브 해를 중심으로한 어업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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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인지 사택인지 아니면 오피슨지 중의 하나일 듯 한데 도대체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창문은 있었을까 화장실은 어땠을까 등등이 궁금했는데.....
역시 마야인들 마냥 바람의 신, 바다의 신에게 물어봐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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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astillo #1

처음 보는 마야 유적인데 어디선가 눈에 익다 했더니, 내 삶을 한 때 "좀먹었던" 컴퓨터 게임 Age of Empire Conqueror 에서 내가 주로 택하던 유카탄 맵에 등장하던 그 건축물들 아닌가!
앙상블 소프트웨어는 역시 대단한 녀석들이다. 시리즈 3를 다시 한번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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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astillo #2

단체관광객이 다 빠져나간 후라서 그런지 한적해서 좋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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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astill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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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astillo #4
이사진은 나오는 길에 찍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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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사진들을 보정하는 방식이 달라서 똑같은 사진기로 같은 설정에서 위치만 바꿔서 찍었는데도 색감들이 다른 듯 하다. 막눈이라 선별력도 없고 프로그램 다루는 숙련도도 떨어지는 어쩔수 없는 상황인데, 사진이 많으니 어쨌든 나눠서 올려야 할 듯 하다.


2008년 2월 27일 수요일

서울대 맑스주의 경제학자 임용을 둘러 싼 논쟁과 "자본론"

서울대 김수행 교수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는가 보다.
작년부터 김수행 교수가 은퇴하면 서울대 경제학과에 맑스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새로 임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터져나오더니, 이젠 기정 사실화 되어가는 것 같다. 학부를 담당하는 과장도 대표적 발전론자이자 식민지 근대화론자 이영훈 교수라니 그나마 "배려"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듯 하고...
학내 사정이야 아는 바가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인데다가,
퇴임하는 교수의 관심사와 영역을 "땜방"하는 교수 임용이라는 것도 대단히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논리이기에 해당 과의 판단과 결정에 따를 일이겠지만, 오마이뉴스에 올라 오는 여러기사들을 보면서 착찹한 심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족 하나, 한국식 대학교수 "정년퇴임제"도 문제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불난데 부채질 하는 격이지만, 나는 김수행의 비봉출판사 자본론 번역 판본을 지극히 혐오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강금실의 전 남편이 경영했다는 이론과 실천에서 나온 자본론 번역이 그나마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인데, 최소한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프트커버"라는 점에서 만도 그러하다. 빚만 남기고 출판사가 망해 강변호사가 그 빚을 떠 안았다니 이론과 출판사의 자본론은 그 자체로 참으로 기구한 역사를 남긴 셈이다. 물론 백의 출판사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판 자본론은 안타깝게도 "주체사상"의 빛에 가려 큰 관심조차 없었으니 논외로 하고. 

다시 김수행 역 자본론의 문제로 돌아가면, 내 혐오는 그가 번역판권으로 새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는 가쉽 같은데 있기 보다는, 가장 민중의 삶 속에 가깝고 노동자의 관점에 가까워야할 맑스주의 경제학의 "정전"을 숱한 한자 사용 번역으로,  무지랭이 비한자세대 노동자들로 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십오년쯤 전에 사회과학 서점에 꽂혀있는 김수행의 자본론을 보고 "화폐론"이라고 읽었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내게 대학생 친구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 열사의 한이 서린 "근로기준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본론이 되어버린 셈인데, 그런 "대학교재"다운 번역이 아니었으면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시절 맑스의 주저를 번역하는게 가능하기야 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맑스주의 경제학의 역사는 그 자체로써 투쟁의 역사이고, 우리가 이미 목도한 바 역사적 시행착오의 역사였음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10쇄 이상 찍어내는 그 세월의 한자리에서는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언어와 친절한 번역정도는 해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결국 그렇게 저렇게 겉돌던 맑스주의 경제학"사"가 한명의 교수가 퇴직하니 마치 맑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대학내에서 끊기고 말게될 것이란 "불안감"을 생산하고 만 것 아니겠는가?

언젠가 노무현은 자신의 무기력한 청와대 권력을 한탄하면서, 열명의 경제자문위원을 만나면, 그중 한명의 진보적 경제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힘들다고 말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다수"의 의견을 쫒지 않을 수 없다는 핑계섞인 논리로 자신의 친 시장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민주주의적 이성"을 보여준 셈인데, 그의 정치적 무지와 무능력은 차지하고라도, 이땅의 맑스주의 경제학자라면 적어도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단지 신자유주의 경제상황하에 놓인 "시대"를 한탄하면서, 대학과 대중의 탈/반맑스주의적 경향을 "학적 다양성" 수준에서 소극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학적 구걸"행위 밖에 더 되겠는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내가 공부하고 하고 있는 대학의 신문에, 공화당 대학생 위원회의 한 학생이 왜 "역사학과"에는 "보수학자"가 없는가하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적이 있었다. 사건은 옥스퍼드, 하버드에서 수학하고 상당수의 저작까지 가지고 있는 한 학자가 역사학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것으로 부터 발단이 되었는데, 문제를 제기 한 학생은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수적인 역사학을 배울 "학습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학교자체가 갈수록 "진보적"이고 "맑스주의적"인 학풍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했었다. 요약하자면 "대학을 진보적 학자들이 장악했다"는 "폭로"가 그 글의 내용이었다.
이 사건이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자 "제국"인 미국의 한 사립대학의 일이라면 아마도 많은 한국사람들은 믿기 어려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학생의 "학습권 보장" "다양성 확보"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과에서는 자신들의 결정은 "학적 양심"에 따른 것이라는 짤막한 논평을 내놓았고, 대다수의 학생들도 대체로 이 상황을 문제 삼지 않았다.
거친 비교가 되겠지만, 이 상황과 한국의 작금의 상황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학문의 역사, 혹은 학적 계보의 역사는 그 자체로써 투쟁의 역사이다. 그것은 단지 시류를 한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사회와 투쟁하는 하나의 실천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실천은 "공부하는 자" "가르치는 자"등 학문의 생산에 관계하고 있는 자들의 일차적인 소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맑스주의 경제학자 없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우려하는 여러 목소리들은 그 자체로써는 지극히 정당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순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 학적 실천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식의 우려와 한탄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도대체 어쩌다가 맑스주의 경제학이 "불필요한 학"의 범주로 치부되고 말았는가?
과연 맑스주의 경제학은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대학과 대학밖 사람들에게 제시 할 수 있을 것일까?

대학의 교수 자리 하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이순간 맑스주의자들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그와 같은 문제가 아닐까 싶다.
"펀드매니저"와 "컨설턴트"의 꿈만이 경제학의 최고봉에 걸려있을 때,
맑스주의 경제학은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파리의 연인"같은 드라마에서 성공한 CEO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자본론"을 꼽았던 것 처럼, 하나의 패션이자 악세사리 정도가 맑스주의 경제학의 자리일까?

그나마 정운영선생과 같은 논객도 사라진 이 시대에, 맑스주의 경제학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인지 대학의 맑시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2008년 2월 17일 일요일

복잡성과 복잡한 것들의 차이라...

바슐라르가 그랬다.

"단순한 것들은 단순화된 것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과학은 단순한 사고들을 의문시 하지 않았다면, 결코 진보하지 못 했을 것이라고..

부르디유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적인 경험세계로 부터 도출해낸 분명한 이미지들 혹은 익숙한 과학적 전통에 너무 쉽게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고.

아마도 그게 단순한 인식/사고과정을 뜻하는 것이리라.

복잡한 것들은 단순한 것들과 다르다. 단순한 인식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복잡성은 종종 단순한 것과 혼동된다.
단순화된 복잡한 것들로서 복잡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여 단순함을 어떤 복잡성의 형식으로 생산해내는 인식 구조가 관계하는 한,
사실 복잡한 것은 복잡성으로 단순하게 치환될 수 없고,
복잡성은 복잡한 것들로 단순히 전개될 수 없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사실상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전제가 복잡성인데,
이것은 형식적 단순함으로 복잡성을 생산하는 복잡한 인식과정을 전제한다. 

이 과정은 변증법이지 않은가?
부르디유는 왜 이과정을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려 했을까?
왜 스스로 단순화된 복잡성을 단순한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을 생산하고 말았을까?

2008년 2월 15일 금요일

"내 마음의 숭례문" ? -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오랜만이었다. 그의 이름을 인터넷 매체에서나마 보게 되는 것은.
박.노.해.
한때 그 이름만으로도 "남한 노동자계급"을 대변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를 대변할 만한 그.
여전히 본명인 박.기.평. 보다는 박노해가 익숙한 그의 이름을
다시 인터넷 신문에서 보게 되니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노선을 지지했던 안했 건 간에,
그와 내가 직접 안면이 있었던 아니건 간에,
박.노.해로 살아 온 그의 삶의 궤적과 내 삶도 한 때 먼발치에서 반향하며
소용돌이 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 서울의 유명 학원가로 진출한 담임선생이,
"네가 박노해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협박하던 그날은 아직 내 뇌리에 생생하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된, 주로 묵주 받으러 호텔에 가시는 정형근이 안기부에서 박노해를 취조하면서 했다던 이야기를 듣고 마치 내가 박노해인양 한 인간에 대한 살의를 느꼈던 때도 있었다.
대학도 안나 온 노동자 주제에 그런 글을 썼을리가 없다며,
박노해에게 "배후"를 대라고 끝까지 추궁했다던 정형근은, 
시쳇말로 박노해를 "두번 죽이고"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싸잡아 무시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주더니, "묵주신공"으로 위기를 타파하는 기술까지 보여준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다.

그 후 박노해가 감옥에서 나오고,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는가 싶더니,
정형근 "심문효과" 였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여러 "엘리트" "지도층인사"들과 나눔문화던가 포럼인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래저래 경로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참으로 덧없어,
벌써 몇년 전이 되어버린 이라크전 발발 당시 훌쩍 이라크로 떠났던 그의 모습도 아직 생생하고.
그는 돌아왔지만 이라크는 여전히 포연과 통곡속에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런데 아.....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마음의 숭례문"...

박노해의 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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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오마이뉴스에서도 봤지만, 레디앙에서 봤을 때가 더 충격이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789

사진도 박노해가 찍었고 시도 박노해가 썼다니 그의 작품이 맞긴 한가 보다.
솔직히 레디앙의 덧글에 누군가 거칠게 쓰기도 했지만, 박노해 이름을 지우고 보면, 중고등학생정도가 썼으면 교내 백일장이나 "야쿠르트 건강 글짓기"정도에서 입선 정도는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나마도 너무나 모범생적 강박을 지닌 어떤 이의 감상의 언어가 그득한...
 
아... "내 마음의 숭례문"이라니.....
그래... 시대가 변했고, 그가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세상에 격분하여,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 시각"에서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썼을 때 언급한 개인 일화처럼..... 이제 그는 서울역에 갈때마다 그 앞 대우 본사 화장실에서 가서 오줌을 갈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숭례문 야경을 찍는 여유는 있게 되었고,
김우중이 파산한 재벌에 늙고 병들어가는 사이,
그는 이제  "건강한" 명사들과 와인잔을 부딪치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고민하는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니까... 

그래 어쩌면 내가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도, 사실 조금은 지겨운 내러티브다.
강산이 변해가듯 세상도 변해가고, 어느날 숭례문이 불타듯 인생도 화상을 입고 복원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무슨 "내 마음의 숭례문"이란 말인가?
무슨 얼어죽을 "600년을 지켜온 이땅의 자존심" 운운이란 말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도 아니고..

"내마음의 남대문 시장 상인"도 아니고,
"내마음의 서울역 노숙자"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박기평도 아닌 박노해가 지금 "내 마음의 숭례문" 타령을 해대냔 말이다.

아... 참을수 없는 한 숨이 그가 박노해라는 이름으로 썼다는 시한편에서 터져나왔다.

숭례문을 인격화하는 그는 도대체 무슨 "불로장생" 불사조 신화를 쓰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 그가 자기 성찰에 지나치게 매몰 된 채,
세상의 여러 아픔들, 정작 이웃의 고통은 이제 "대숲에 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는 의구심이 생겼다면 너무한 것일까?
대체 우리가 언제 부터 숭례문을 바라보며 삶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일까?
숭례문 "애도"와 인터넷에서의 "지못미" 캠페인은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인가?

어떤이의 시니컬한 반응 마냥 "노해"의 이름으로 "도사"의 언어를 뿜어내는 것은 이제 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노해"의 길에 도사나 순진한 소년들의 언어가 들어찰 자리란 안타깝게도 없다.

불탄 숭례문을 바라보면서 "나누어"야 할 것은
그런 "풍금소리" 같은 감상이 아니고,
"불의 침묵으로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은 숭례문이 아니라,
세상의 부정과 삶의 고난들과 맞서 살아온 민중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13일 수요일

"그때 일어나셨습니까?"

대학교 때였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시각,
낮잠자고 있던 노동자도 "위대한 프롤레타리아"인지,
농담인지 진지했는지 모를 이야기를 나눴던게 기억이 나는데,
생각해보면 "위대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데 잠도 참 결정적인 셈이다.

그건 러시아 이야기고, 그저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한국은 온 사회가 4당 5락이네 하며,
잠을 줄이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강박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심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던 것도 같다.

한때 밤 9시면 온 나라가 아이들을 재우려 나서 듯,
"일찍자고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가 됩시다"고 압박을 하다가,
어느순간  "4당 5락", 눈에 성냥깨비 끼우고 엽기 날을 새는 청소년을 만들어 낼때는,
좀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아이들의 수면규율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권위의 자리란 소린가?
잠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몸과 정신을 통제하는데 결정적이란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데...

거창하지만, "훈육기계"가 오작동 한 내 인생에 잠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 범위와 다발성에서 타의 추종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오후 1시에 집을 수리하러 오기로 되어있었다.
이미 지난 1월 한번의 약속을 잠자다 놓친 적이 있는 전력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시간도 오후 1시면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고....

한데 항상 일들이 그렇듯, 어제 밤을 꼴딱 새고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쓰러지듯 눈을 붙였다.
두개의 알람을 꺼지지 않도록 초강력 셋팅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2시, 12시 30분, 12시 33분, 12시 45분......
거의 한시간을 10여분 단위로 나누어 잠든 나를 불러낼 참이었는데,
알람의 "호소"는 나름 성공적이어서, 거의 10분 단위로 약속시간 전에 잠을 깼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
12시, 12시 30분.. 12시 40분 그리고...12시 45분 알람을 끄고 나서 눈을 떠보니
1시 10분!
헉! 왜 1시엔 날 못 깨운것이야 이 "알람"아!!!!!!!

그래도 혹시나,
설마 그사이 집에 왔다 가진 않았겠지 하고 전화를 해보니,

벌써 집에 왔다 갔단다.
어찌 이런 일이..

똥싼놈이 성낸다고,
내가 되려 "왔으면 초인종이라도 눌러보지 그랬냐"고 하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해봤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결국 나도 내가 자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인간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20여분간 쓰러져 있던 나를 도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불규칙 생활 리듬. 밤과 낮이 뒤바뀐 생활이 하루이틀이 아니라지만,
자꾸만 "잠"을 통제하려고 바둥거려왔던,
내인생이,
이젠 "잠"의 역습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상황이
너무 빈번해 지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날새는데는 누구보다 자신 있던 몸은 집중력과 비생산성을 노출하기 시작하더니,
줄담배와 두통만을 항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한번 쓰러지면 이불속에 파묻혀 일어나길 거부하는 몸뚱이가 되어버리니...

"그때 일어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 자체가
공포인 이 삶에서 어찌 빠져나올지 정말 막막하기 그지 없다.

하여 오늘도 결국 1시 10분 기상의 참화를 또 뒤로 하고 이불 뒤집어 쓰더니,
결국 해 저무는 5시에 일어나고 만 것 아닌가!!!!!
걸려 온 자동차 정비 서비스 만족도 설문 전화에
Yes, Good, Excellent ! 를 해주면서...

Tulúm - 뚤룸 마야 유적지 입구 #1

어느 여행 가이드 북이나 다들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을 여러 카테고리에 따라 선정해 놓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멕시코 고고학 유적지 중에서 테오티우아칸, 치첸이차, 그리고 뚤룸 세곳은 "초강추"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 가보는 것은 일단 여행의 기본 점수는 확보하는 것인 셈인데, 역설적으로는 그래서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같은 것을 기대하기란 쉽지가 않다.

세 곳 중에 다른 두곳이 규모로 승부하는 곳이라면, 뚤룸은 카리브 바닷가에 위치한 독특함으로 눈길을 끄는 곳이다. 실속으로 승부하는 곳이랄까. 칸쿤 리조트만 왔다가는 상당수의 미국, 유럽 관광객이 단일치기로 들러볼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하고.

뚤룸 같은 "유명 명승고적"은 인터넷에 그 정보가 널려 있으니 , 별달리 소개를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대개 칸쿤에서 튜어버스를 이용해 하루 코스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내 경우엔 ADO를 타고 개인적으로 가는 바람에 불필요한 시간 낭비가 있었던 것도 같다. 튜어는 튜어대로 끼어팔기식 루트를 잡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포인트 투 포인트"를 곧바로 옮겨가는 이동이 안되는 단점이 있는 듯.

ADO 뚤룸행 버스는 뚤룸시를 향해가는 노선이기 때문에 뚤룸시내에 도착하기 직전 고고학 유적지에서 하차해야 한다. 고고학 유적이 바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해서 차안의 승객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한 멕시코 아저씨가 일본사람 아니라고 해도 자꾸 능숙한 일본어로 대화를 시도해서, 띄엄띄엄 알아 듣고 내리긴 했는데, 등뒤로 끝내 "사요나라"까지 날라왔다.
어디서 일본어를 그리 배우신 것일까 궁금하다가, 영어로 전세계인을 "몰입"시키는 미국 옆나라에 사시면서 어찌 영어는 한마디도 못 하실까 갸우뚱 해하다가, "이웃나라"인 일본어 중국어 못하는 나도 그 아저씨 입장에서 보면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멕시코 사람들에겐 일본어보단 영어가 백배는 쉬울 텐데...

참고로 뚤룸 고고학 유적지 바로 앞에는 ADO 버스의 사무실이 있다. 돌아가는 버스표를 그곳에서 사도 되고, 버스를 기다리는 대기실도 마련되어 있다.
뚤룸과 칸쿤간 ADO 버스는 갈때는 Xel-Ha 를 들러가는 노선이었는데, 돌아갈때는 Playa del Carmen 까지도 들려가는 "직통"노선이 아니라 "직행"노선이었다. 각 시간 대마다 경유지가 다른 것도 같았다.
소요시간은 노선과 시간대에 따라 2시간에서 3시간까지 걸렸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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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adores: 미소짓는 아저씨가 나중에 수금하러 오는 바람에.. ^^


뚤룸의 셔틀 매표소 앞에서는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명승고적지"에서 공연을 하는 것도 좋아보였는데, 차에서 내려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것 보다는 뭔가 "덤으로" 경험할 기회를 갖는 것도 장소에 대한 친밀도와 기억의 농도를 높여 주는 것도 같다.

이제서야 알게된 것이지만, 셔틀 매표소 앞 공연은 "Voladores"라고 불리우는 전통 의식이었다.
볼라도레스에 관해서는 나중에 멕시코 인류학 박물관을 정리할 때 정리하는게 나을 것 같은데, 찾아보니 재밌는 사실은 이 의식이 마야와는 직접인 관련이 없는 종족(Totonac)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마야의 대표적 유적 앞에서의 상설 공연이 타 종족의 전통 의식의 하나인 셈이었는데, 멕시칸 "전통"이라는 하나의 카데고리로 묶는다고 보면 이상할 것은 없는 것도 같고....
다만 나처럼 준비되지 못한 여행자가 그러하듯, 어설프게 다른 문화적 전통을 마야의 전통 의식으로 생각하는 오해를 피할 소개 정도는 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달까? 가이드북도 안들고 와서리, "보는 것이 믿는 것"이란 배짱만 있었던 터여서, 떠오르는 질문들에 "억측"으로 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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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adores 셔틀 타고 가다 찍은 사진.

전봇대보다 더 높은데 한전에서 스카우트라도 ^^
나도 군시절 전봇대 좀 타봤지만 그건 안전장구를 다 갖추고 올라갔던 것이고..

갑자기 화창하던 날씨가 뚤룸 유적지를 향하려던 때 먹구름으로 뒤덮혔다. 살갗이 탈 우려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화창한 하늘을 기대했던 터라, 또 카리브의 햇살이 쏟아지는 "뚤룸 해변"을 한번 보고 싶었던 차라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나중엔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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뚤룸 셔틀버스


뚤룸 셔틀 매표소에서 유적지 입구까지는 사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날씨가 덥고 비가 오거나 한다면 모를까 굳이 셔틀을 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내가 그랬듯 초행자들은 "셔틀까지 있는 걸 보니 상당히 먼가보네" 하면서 지레짐작으로 왕복 셔틀 티켓을 사게 되는 듯. 

표를 끊자 마자 셔틀이 출발을 하려한데다가, 볼라도레스 공연이 끝나고 아저씨가 잔돈도 없는 내게 팁을 받으로 오는 통에 얼렁뚱땅  절묘하게 도망치듯 셔틀에 올랐는데, 유적지 입구에 도착해 보니 카메라 렌즈 뚜껑이 없다.
결국 셔틀을 타고 왔던 길을 다시 걸어 되돌아가, 벤치위에 놓여있는 렌즈 뚜껑을 찾아 와야만 했다. 내게 팁받으러 왔던 아저씨가 공연중이어서 그나마 쪽팔림은 면할수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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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현지 방문 증명 샷" 같은 사진이 하나 있어서 올려본다. 안경이나 제대로 쓸 껄... ^^ 
왜 찍었는지가 생각이 안나는데.... 거 참...
누구 말마따나 블로그의 개인홈페이지화를 막기위해선 자기 사진 같은 것은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데,
사명감을 가지고 블로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벌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왜 글이나 사진을 올리고 있는지 스스로 궁금해 하는 것을 보면, 얼마간 딴짓 혹은 소일거리로 블로깅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각이 잡힐까도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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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앞 유적지 진입 통로


뚤룸 유적지 출구? 공식출구는 아니지만 대부분 이곳으로 유적지를 빠져나온다. (사실은 공식 입구다.^^)
매표소 앞 지도를 확인한 사람들은 모두 나름 합리적 동선으로 움직여야겠다는 강박에 빠지는데, 그 결과 대체로 매표소앞 통로는 출구가 되는게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하는 듯. 게다가 나오는 사람들만 보게 되니까...
나도 그렇게 눈앞에 놓인 진입통로를 외면하고 왼쪽 통로로 돌아 들어갔다.
그렇게 해보니 그게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사실만 깨달았다. 머리굴릴 필요가 없었는데, 사람들은 가끔 쓸데없이 스스로를 시험한다. ^^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려고 하면서 보니까 벌서 관광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점심을 먹고 온 것이었으니 그들은 이제 오전 관광을 끝내고 다음 행선지로 향할 때였나 보다.
"명승고적지"에서는 단체 관광객들의 늘어선 행렬을 피하는 것도 운이고 보면,  그나마 "때"를 잘 맞췄달까?


2008년 2월 12일 화요일

Piñata - 멕시코 전통 박 터트리기?

이전에 칸쿤 시청 사진을 올리면서 별모양의 장식물이 무엇일까에 대해 스스로 자문 했었는데,
지난 주말 동네 한국 마켓에 가보니 그 내부에도 그것과 똑같은 장식이 있었다 (참고로 동네 한국마켓은 라티노마켓을 겸하고 있다).
이전에도 봤던 것인데 그때는 보여도 안보였으니, 졸지에 "방화 공범"이 되신 유홍준이 이전에 히트시킨 말 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떄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니라"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사실 사랑까지는 좀 낯 간지럽고, 관심과 열정 정도면 족 한달까? "전과 같지 않아"서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불 타 무너진 후" 사랑해 왔노라고 느닺없는 "상처가"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각설하고...

궁금해 하던 차에, 중남미에서 오랬 동안 생활하신 주인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그 별모양의 장식이 Piñata (피나따? 삐나따? ^^;;) 라고 부르는,  특히 멕시코에서 파티, 잔칫날 빠지지 않는 장식이라고 친절히 알려주셨다. 덕분에 멕시코에 대한 궁금증 하나를 해결 할 방법을 찾았다.

그렇지않아도 뚤룸(Tulum) 사진들을 한꺼번에 정리할 참이 었는데, 그 중 Pinata 사진이 하나 있어 이 기회에 잠깐 정리해 놓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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뚤룸 고고학 유적지 입구에 있는 식당 내부 (피자 맛이 예술이었다)

내부에 걸려있는 Piñata

Piñata 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진 않은 모양이다. 다만, 이른바 혼성기원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아 소개하자면 이렇다. 

(위키피디아와 Wendy Devlin 이란 사람의 견해를 종합한 내용)
웬디에 따르면, 아마도
Piñata는 중국에서 연유한 것 같단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현재의 Piñata와 비슷한 잔치용 장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단다. 당시 중국에서는 설날에 관리들이 씨앗(종자?)이 담긴 형형색색의 종이로 장식된  황소 모형을 터트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대체로 행운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고 한다. 그 풍습이 콜럼버스씨 보다는 백배 정도는 더 착하다고 해줄 법한 폴로씨의 소개 덕택에 14세기 전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대개 사순절 첫 번째 일요일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단다. 심지어  사순절  첫번째 일요일을 "Piñata 일요일"이라고 부르기 까지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어로 "Pinata"는 "깨지기 쉬운 몸(점토로 만든 성상)"이란 뜻이라고 한다. Piñata를 사용하는 의식은 스페인에서도 크게 유행했는데, 16세기 멕시코등지로 건너온 선교사들이 "문자없는 원주민"들을 개종시키는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선교사들이 와서 보니 멕시코 원주민들도 비슷한 장식물을 의례에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멕시코 기원설은 대개 아즈텍 문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가서 "달걀만 세웠"으면 세상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콜럼버스 이전의 아즈텍 문화에는 Tlaloc 이란 비와 물과 풍요를 관장하는 신에 제사를 올릴 때 점토로 만든 물이 든 단지를 깨트리는 의식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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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aloc (뜰라록?): 출처 위키피디아


다른 버젼은 이른바 "아즈텍 전쟁의 신"이자 "남부의 벌새"란 뜻을 지닌 신인 Huitzilopochtli (위실로뽀츠리?)와 관련지어 Piñata를 설명하는데, 털로 장식되고 작은 보물들이 들어있는 성상을 연말에 작대기나 몽둥이로 쳐서(오자미가 아니라) 연말에 터트리곤 했다고 한다.
마야인들은 이걸 스포츠로 즐기기도 했다는데, 선수들이 눈가리고 몽둥이나 작대기로 Piñata를 찾아 두드려 터트리는 경기가 있었다는 설이있단다. 선수들 서로 두들기는 것을 지켜보는 "명랑운동회" 스타일이었는지, 누가 누가 먼저 터트냐가 문제시 되는 "기록경기"로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도 체육대회때 박터트리기 하곤 했었는데, 아직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풍선터트리기가 이젠 더 일반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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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itzilopochtli (위실로뽀츠리?): 출처 위키피디아


맨 첫 사진에 보는 별 모양 Piñata 의 뿔은 6개(개량형인가?)인데, 보통 7개 뿔이 달린 Piñata가 "전통"적으로 널리 쓰여왔단다. 그 이유는 Piñata 가 멕시코에서는 대개 연말에 사용되었고 또 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일주일을 상징하는 의미로 정착된 결과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신들의 형상이 주종을 이루었다고... 사실 세계 최고 중의 하나인 멕시코 고고학 발굴 팀이 이 문제를 규명해 내기 힘든 이유는, 안터진 Piñata를 묻어 놓거나 하는 매장 풍습같은 것이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터지라고 만든 것이니까...

오늘날 까지 이어진 Piñata 전통은 멕시코에서 크리스마스, 연말, 생일파티, 주요 파티에 빼놓을  수 없는 장식물로 정착되었다.
선교사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의미 보다는 "재미"로 변환된 셈이고 6개 뿔짜리 Piñata 처럼 의미보다는 장식미가 더 강화되어가고, 최근에는 심지어 에니메이션 케릭터, 차등 각종 모양의 Piñata 까지도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아이들을 위한 파티에서 보다 사랑 받는 Piñata 이니....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요즘 아이들도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아니..."숭 숭 숭례문을 열어라 흥 흥 흥인지문 열어라 열두시가 되며는 문을 닫는다"같은 노래를 부르고 놀기는 하는가?)

Piñata 내부의 숨겨진 내용물도 물과 보물, 그리고 과일, 사탕수수에서 사탕이나 과자등으로 변화했다고 하는데, 점차 내용물과는 상관 없는 명절, 잔치용 "실내 장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인가 보다.

중국의 전통이 유럽을 돌아 멕시코 원주민의 전통과 결합되는 과정이 그리 아름다운 "혼성"과정은 아니었던게 분명하지만, 전파론자들의 단선적인 설명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유희적 전유 가능성"과 예측불가능한 "혼성성"이 만들어낸 생산적 힘이야 말로, 멕시코 Piñata를 멕시코인들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지속적으로 자리잡게 한게 아니었나 싶다.

한국에서는 설날 연휴에 Piñata가 터진게 아니라 숭례문이 불 타 무너졌다고 하는데, 누구 책임인가 논쟁들만 할 것이 아니라, 또 무슨 911 사태마냥 국민 모금 운동만 하겠다는 "정치적 발상"만 할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우리의 문화 유산 전반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의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적" 중심의 문화재 정책이란게 또 얼마나 전시적인 "정책" 이던가? 사실 "대문"을 "국보1호"로 지정한 역사도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기도 하고, 건축물 중심 "문화유산" 관리도 편향적인 것인 것은 틀림없다. 사실 그 마저도 제대로 안하는 우리나라지만. 어쨌든 그저 "복원" 하고 말 문제는 아닌 듯 싶다.

멕시코의 Piñata 처럼 생활속에 파고든 문화적 자산들에 대한 관심과 보존이 숭례문 복원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한다. Piñata의 경우 이제 미국의 Toys"R"us 나 파티 스토어에서도 팔리는 "상품"이 되었으니 정책 결정자들이 좋아하는 "경제성"도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김치나 드라마 디비디만 팔아 한류라고 떠들게 아니라 말이다.

2008년 2월 11일 월요일

과외 받는 미국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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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학 도서관 화장실내 과외광고 (핸드폰촬영..도촬한다고 옆방?에서 신고할까봐 조마조마했다. 셔터소리때문에.. ^^)


대학생들의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다는 기사를 언제가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 대학만의 일은 아닌가보다.

미국 대학의 도서관 복사기 주변, 셔틀버스 정거장등에서 각종 "아카데믹 서비스"광고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엔 미국 대학생들, 유학생들이 함께 버거워하는 작문, 이력서, 계획서, 논문등등의 교정 서비스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로스쿨, 메디컬 스쿨, MBA등의 "입시과외"도 갈수록 많아지는 추세다. 한국도 그런 광고들이 있지만, 그래도 한국은 과외강사 모집광고도 상당한 편이니 그나마 좀 차이가 있달까?

며칠 전 도서관 화장실에 가 보니, 화장실 안쪽 문에 광고 전단 하나가 붙어있었다.
한데 그 광고는 다른 광고들과는 다른 말 그대로 "과외" 그것도 "특정 수업과외" 광고 전단이 아닌가? 
특정과목 학점을 위해 하는 과외! 

학기초, "기말 전에 도움을 구하라!"라고 협박하는 이 광고는 그 수업을 듣건 안듣건 간에, 사람들의 편안한 배변생활을 위협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뜯겨나간 연락처가 화장지 대용으로 쓰이진 않았을 테니, 광고에서 "서광"을 발견하고 "뿌듯함"을 떼어내 문을 나서는 학생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대학이 오직 학점과 취업만을 위해, 그리고 상위 "전문대학원"진학을 위해 거쳐가는 과정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인가하는 씁쓸함이 치올랐다. 날로 치솟는 대학등록금을 "환수"해야한다는 강박,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경쟁의 무한증식에 가위눌린 그들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이경숙같이 지성이나 학자적 양심과는 하등 관계없는 장사치 CEO 형 교수가 대학을 대표하고, 정치판에서 권력 쫒을 때만 "교수"로써 지성인 행세를 하는 세상이 된지도 오래다. 학생들만 탓하는 인간들, "기초학력이 떨어지네" 뭐네 해대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 교수들이 결국 대학을 포기한 셈이니 그들도 이제 "사교육"시장의 도전을 받아야하는 것은 자업자득일 테다. (이점에서 보면 이제 그 "특정과목들"은 대학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어진 셈이기도 하다. 사교육시장이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보따리들 싸시던가...)

하지만 그래도 대학은 다양한 삶들이 부대끼며 "희망"과 "새로움"을 만들어가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학내에서도 "돈되는" 과목만을 수강하고 그 속에서 과외까지 받으며 학점경쟁을 하는 것을 또 언제 조중동 같은 신문들이 받아서, "미국의 대학들"도 그러하니 우리도 대학내 특정과목 "몰입교육"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설지도 모르겠다.
이미 "돈안되는 과"의 폐지를 해대는 미국적 모델이 한국의 상당수 대학들에 일반화되어있고, 그 돈안되는 과들은 "교양학부"라는 아이러니한 이름 아래서 서로 자리다툼하고 있는 실정이니 "기차 떠난지" 오래되었다고, 체념해야할까?

이제 대학에서의 희망 같은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시덥잖은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대안 같은 것은, "두잉 베스트"하시겠다는 분들께 맡겨놓고, 차라리 "대학에서의 자유"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인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율성을 지키고자 하는 시도까지 무시되어서야 하는가 의심스럽다.
대학을 보다 철저히 자본의 이해에 귀속되도록 관리 감독 하고 싶어하는 시도에 맞서,
"성적을 폐지하라!"라고 맞선 이의 외침이 그저 몽상가의 헛소리 밖에 아닐까하는 고민정도는 해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대학은 적어도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탓만하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연구가 그렇고, 학문의 생산이란 다른 현실의 생산 혹은 그 가능성의 지평을 여는 것일 텐데.....

"성적을 폐지하라!" 번역글 보기 (자율평론)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원더걸스 VS 오바마 걸?

사실 원더걸스는 잘 모르니 패스~

미국 대선의 민주당 경선이 한치 앞을 모르는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미국의 인터넷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는데,
그중 말그대로 "HOT"한 비디오 하나가 유투브에 올라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른바 오바마 걸 (Obama Girl). 그들의 뮤직비디오가 유투브에 올라온 이래 현재까지 600만명이 조회하는 개가를 올렸다. 한 잡지에서는 2007년 인터넷을 달군 최고의 동영상 스타로 이 오바마 걸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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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obamagirl.typepad.com/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등장과 맞물려 선거에서의 인터넷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가 되어왔지만,  이번처럼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비정치적" 혹은 "간신히" 정치적인 뮤직비디오가 화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NBC, FOX, CNN 등 대부분의 미국 뉴스 채널이 앞다퉈 이 오바마걸 뮤직비디오 열광에 대해 다뤘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실험으로 간주하고는 과연 이 뮤직비디오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젊은 미국의 유권자들을 선거로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인가, 또 오바마 진영에 플러스가 될 것인가 아닐 것인가를 셈하데 시간을 할애 했다. 선거 캠프와는 전혀 상관 없는, 정치적 운동이라기 보다는 "상업성"에 호소하는 이러한 시도가 2008년 미국 대선 대중문화판에 떠오른 새로운 장르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오바마 걸 (Obama Girl): I got a Crush on Obama

오바마 걸의 탄생은, Barelypolitical.com 의 설립자인 Ben Relles 에 의해 이루어졌다. 펜실베니아 출신 가수 Leah Kauffman 과 함께 "재밌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구상한 벤이, 역시 펜실베니아 출신 모델 Amber Lee 를 섭외하여 립싱크 전문 프로젝트 가수 "오바마 걸"을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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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Amber Lee: Obama Girl


오바마 걸의 등장 이후 줄리아니 걸, 롬니 걸등도 등장했고(안타깝게도 둘다 후보사퇴^^), 최근에는 오바마걸의 최대 히트곡 I got a crush on Obama 에 대항해 한 남성 힐러리 지지자가 만든 I got a crush on Hillary 도 유투브에 올라와 있지만 오바마 걸의 독주를 막아내긴 역부족이다.
힐러리는 이번 미국 대선 후보 경선중에, 자신만의 대중문화 아이콘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최근의 일련의 시련은 그 결과의 하나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지나친 섹스어필과 정치에 대한 희화화,
패미니스트 정치의 상징인 힐러리에 대비되는 "상품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비판 때문에 오바마 캠프에서도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오바마 딸도 "비교육적 효과"에 불평을 해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선거 캠프와는 전혀 무관한 이 오바마 걸 동영상이 일개 신인 정치인을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로 알려내는데 한 몫 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

링싱크 가수 앰버 리는 NBC의 인터뷰에서 처음 뮤직 비디오를 찍을 때 자신의 친구들이 오바마가 누구냐고 물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자신도 오바마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나서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 이 오바마 걸 신드롬은 작년에 이미 절정에 다다랐는데,
올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반드시 민주당 슈퍼 튜스데이 프라이머리에 참가해 투표 하겠다"던 오바마 걸이 정작 투표를 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부터이다.
전날 밤늦게 까지 파티를 벌이고, 프라이머리 당일날 "행정상 착오"가 있었다곤 하지만, 어쨌든 정작 "오바마 걸"이 오바마를 지지하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러 호사가들을 즐겁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일부 시니컬한 평론가들은 역시 "젊은이들"의 정치적 지지라는 것은 불안정한 것일 뿐이라며, 오바마 걸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 한국 대선에서도 전혀 대선 후보 같지 않았던 허경영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생각해 보면, 정치에 대한 미디어의 비대해진 영향력에 전혀 새로운 "컨텐츠"를 삽입하는 정치적인 시도들이 앞으로도 많아 질 것임은 틀림없는 듯.




마치 최근의 오바마 "모멘텀"을 상징하는 듯한 "슈퍼 오바마 걸"





오바마 걸스 VS 줄리아니 걸스



* 보너스 * 미국판 "웃긴대학"에 시카고대생이 올린 오볼리우드 비디오
인도의 볼리우드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오바마가 인도이민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으려나?
라티노와 아시안은 힐러리에게 몰표를 주고 있다는데....

2008년 2월 7일 목요일

2MB 생가 영문 안내판 - The Original Hou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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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다 쓰러지는 줄 알았다.
사진 제목인 "누가 진짜?"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영어 몰입 교육을 주창하신 대통령 당선자의 고향집 안내판 반쪽에 드러나 보인 영작문 때문에.
"네이티브 잉글리쉬 스피커"는 아니지만, "미들 스쿨" 부터 지금까지 어쩔수 없이 영어책 손에 쥐고 있긴 한데,
"The Original house o(f?)..."라는 구문으로 사람의 집이나 생가를 뜻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쑥대 테솔"가서 300만원 정도 내면 저런 새로운 표현도 배우려나?

구글에서 the original house of 혹은 original house 를 쳐 보면, "원조" 팬케이크집, "원조" 굴집, "원조" 닭집 등등이 젤 먼저 나온고 그나마도 매우 제한적으로("디 오리지널 팬케잌 하우스"등등으로) 쓰는 말이다.
사람 집에는 기본적으로 쓰지 않는 표현일 뿐더러, 생가나 고향등과는 애초에 관계가 멀어도 한참 먼 영어다.

뭐 당선인께서 인간이길 포기하신다면야,
혹은 저 사진 속 마네킹인지 입간판인지 모를 것 처럼,
(누가진짜란 질문은 그러니까 가짜가 더 인간미가 있어 보인단 말인거겠지? 재치하고는!)
가진자의 "원조" 꼭두각시집 혹은 마네킹집등등을 의미한다면야 뜻이 안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저기가 "원조"집이라니까...
원조 구라든, 원조 무대뽀, 원조 삽질이든...원조 영어몰입쟁이던...
뭐 "원조"긴 하신 모양이다.

그나저나 영어 몰입교육 좋아하시네....

연합통신이 그나마 사진 잘라줘서 국제 창피를 면한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어륀쥐" 경쑥씨가 필요해? (정형근이 "오렌지"는 남경필이라고 했었는데..)
"(권력) 굶었니"  인수위야 부탁해? 
 

추가:
이런 짓까지 해야되나 싶지만,
참고로 2MB 씨네 "원조집"보다 "생가타령 원조"격이고, 좋던 싫던 영어권에 널리 알려진,
북한의 만경대 김일성 생가를 영어로 어찌 표현하나 해서 찾아보니,
"Kim Il Sung Native House"
란다.

2008년 2월 5일 화요일

Cancun 버스 터미널

저녁을 먹고 썰렁한 다운타운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가기로 계획했던 Tulum (뚤룸) 튜어를 예약하려고 했더니,
저녁을 너무 생각없이 늘어지게 먹었던지 이미 상당수의 상가가 철시를 한 상태였다.
겨우, 셔터를 내리기 직전의 한 여행사에 들어갔더니, 다음날 튜어는 이미 사람이 가득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낭패가... 준비와 계획을 안했으면, 빠릇빠릇이라도 해야할 텐데...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칸쿤 버스 터미널로 향했는데,
다행히 다운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걸어갈 수 있었다.

론니플레닛 유카탄(2006년판)에 따르면 유카탄지역의 주요 도시나 관광지는
튜어를 이용하지 않을 경우 ADO를 타면 된다고 나와있었는데, 자세한 시간표는 없다.
알고보니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가능한 것이었는데,
그럴 생각은 애초에 해보지도 않았느니, 결국 현장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참고로 뭔가 문제가 있었던 지 아니면 원래 그런것인지 나중에 다른 곳에서 시도해보니 ADO 사이트의 인터넷 예약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을 하지 않았고, 결국 버스표를 위해서는 항상 터미널에 가야만 했다.
터미널에서는 다른 지역의 버스표도 예약 가능하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다  예약을 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내 경우도 두번정도에 나눠서 그렇게 했던 듯. 연말이나 관광객이 몰리는 시기엔 버스 좌석이 없는 경우가 많고, 등급을 낮추어야 하는 경우엔 여행 시간이 배 이상으로 걸리는 슬픔과 "고통?"을 감수해야한다.

론니플레닛에도 언급이 되어있지만, 멕시코 장거리 버스 시스템은 아주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내가 "편이다"라고 쓴 것은 미국 저자들이 쓴 여행기에서의 감탄이 한국사람들에겐 "나쁘진 않군" 정도로 이해될 여지가 충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우등고속 시스템, 그리고 세분화된 "등급체계"는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다녀본 여행지역만 가지고 비교하자면 최고 인 것 같다. 무엇보다 좌석이(만?) 비행기 비지니스 클레스 급인 한국 우등고속 시스템은 다른 곳에 대중교통 수단으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멕시코에는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버스가 한국에서만 생산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ADO도 그 역사와 명성 만큼은 멕시코에서 단연 최고수준인 것도 분명하다.

ADO (아도라고 부르던듯)는 멕시코 시티 동남부 지역 주요 노선을 독점하다시피 한 버스 회사라고 들었고  실제로도 그러한데, 정확한 명칭은  이제서야 알았지만,  Autobuses de Oriente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동부고속" 정도로 번역될 운수 회사다. 하지만 규모나 역사는 한때 광주고속이었다가 현재는 금호고속이 된 회사에 가깝다고 보면 될 듯.

접근 가능한 정보가 위키피디아 밖에 없어서 그 정보를 참조해 보면,

ADO는 멕시코에서 일등급 그리고 최고급우등(executive-class 우등버스?) 버스를 운영하는 회사다. 1939년 12월 23일 그러니까 멕시코 최대 명절중의 하나인 크리스마스 이브 바로 전날에 6대의 버스로 첫 운행을 시작했는데, 최초 운행 구간은 멕시코 시티에서 뿌에블라, 뻬로떼, 야라빠(J가 ㅇ 발음 나는게 맞다면, Jalapa), 베라크루즈였다고 한다. ADO가 "동부" 고속이 된 것은 멕시코 시티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주요도시들을 운행해서인 듯 하다. 문제는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장거리 대중교통 수요가 없었고, 도로도 매우 위험한데다가 터미널이나 정비소도 없었기에 수익에도 운행자체에도 어려움이 많았단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거리 버스 서비스가 언제 운행을 시행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장거리 버스는 모르겠고 시내버스는 대구에서 호텔 주인 미촌옥씨가 버스운행을 한 1920년이 버스의 최초 등장이란다. 그후 28년에 서울(경성)에 공영버스가 들어왔다고. 호기심 수준에서만 이용을 하는 수준이었다니 버스가 대중교통의 기본이 되는 역사가 전세계적으로 그리 순탄치많은 않았던 셈이다. 떼로 옮겨다니야만 할 수요라는게 결국 근대적 공장제 기계공업과 대규모 국가기구의 정비와 맞물려 있을 테고, 식민지는 신작로 역사처럼 수탈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사실 있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버스 탈 필요는 없었을 테고, 끌려가는자 동원되는자  불가피한 이주와 통근자들이 기본 수요였을 테니까..

다시 ADO로 돌아가면, ADO는 기본적으로 근대적 가치에 충실한 기업이었던 모양이다. 창사이후 모토가 "항상 최고"였다는데, 그래서 가장 최신식 버스를 들여와 운행하는 회사로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다고. 현지에서 타보니 벤츠 아니면 볼보였던 듯. (Busscar 도 있다는데 못 봤다. 사실 있어도 안보였을 거다. 모르니까.)

ADO 버스 서비스의 최고급으로 불리우는 ADO GL(Gran Linea) 은 가격이 비싸 타보진 않았는데, 비행기 기내서비스와 비슷한 차내 음료 서비스도 있다고 한다. 한데 동일 구간에서 시간의 차이는 미미하다.

아, 그리고 ADO는 차내 영화서비스가 있다. 에스빠뇰 더빙이지만..
한국 위성티비 DMB 서비스는 참 놀라운 것이긴 하다. 필요성과 과잉투자 문제를 제외하고 보면.
결정적으로 한국보다 나은 점은 차내에 화장실이 있다는 점일 듯.
물론 터미널을 제외하면 휴게소가 없다는 현실적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생리적 문제로 "조이고" 앉아 술마신듯한 얼굴로 손에 땀나는 오한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이경우에 문제는 역시 뒷자석 승객의 후각고통에게 있겠지만, 예약을 일찍하면 좌석 선택권에 우선이 있으니...

다른 버스 회사들, UNO나 OCC와는 요금, 서비스등등이 차이가 좀 있는 것 같다. UNO는 잘 모르겠고(ADO GL급이었던 듯) OCC는 확실히 ADO보다 미묘하게 한등급 아래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차지도 상대적으로 많을 뿐더러, 따라서 동일구간 여행시간도 많이 걸린다. 하여, 당연 가격은 싸다.

OCC는 오하까 갈때 이용했었다. 멕시코 사람 말로는 "그놈이 그놈이여"였지만, 찾아보니 OCC는 Omnibus Cristobal Colon 이란 운수회사다. 

나중에 다시 말할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칸쿤에서 어쩔 수 없이 타게 된 Oriente 라는,
ADO가 운영한다던 이등급 버스는 갈길 바쁜 여행객에게는 최악이었다. 가격은 무지 싸다지만, 장거리 시내버스, 간이역의 벗 비둘기호(통일호로 바뀌었지만)급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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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티켓팅 가능하다. 대부분의 경우엔.

카드를 받아주는지는 확인을 못했는데, 멕시코에서 카드 사용은 그리 편리한 것은 아니었다. 

데빗카드 (국제현금카드)를 써 페소를 인출하는 경우에, 멕시코 ATM에서 일괄적으로 $7 를 빼간다.
물론 이것만 빼가는게 아니라, 계좌를 보유한 은행에서도 그보다는 작지만 또 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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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뚤룸행 버스를 타러가다 찍은 터미널 사진. ADO가 직접 운영한다.
터미널은 조립식 건물인데도 가건물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대형 유리의 시각적 효과가 "투명성"의 근대 건축미적 가치를 표현하는가도 싶은데,
벌써 10년전의 기억이지만, 로마였던가? 그 어디에도 벽면 한쪽이 유리로만 이루어진 터미널(버스가 아니라 기차역이었지만)이 있었던 것도 같다. 무쏠리니 시대의 작품이라던가? 가물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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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 터미널 2층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오다 찍은 터미널 내부 사진.
멕시코 화장실은 식당이나 카페를 제외하면 유료인데, 버스터미널 화장실은 3페소(30센트, 입석과 좌석의 구분은 없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터미널 화장실 내부(남자)에는 청소하는 아저씨가 상주하고 있었다.
나이트클럽도 아닌 데도, 이용자가 손을 씻으면 재빨리 화장지를 뽑아 주며 팁을 기대하는 바람에,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사진 속 처자들이 Xel-Ha 봉다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물놀이를 연이틀째 가는 듯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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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버스터미널 앞 풍경. 구두를 닦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반바지에 운동화를 닦는 풍습은 "후까시" 풍습 계보에서도 좀 독특한 듯.
뭐 한국도 청바지도 다려입는 사람 있고, 양말도 드라이크리닝 한다던데... ^^;;

2008년 2월 4일 월요일

"타도 주사파! ? 해체 민노당!" --PD파의 잃어버린 10년

당원도 아닌게,
일심회 누군가가 11개까지 세분화해 분리 보고했다던
그 "널린" 정파에도 못 속하는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우스운 일이란 건 안다.
 
먼발치에서 불구경 하던 구경꾼이 결국 그 집 다 타버렸구나 하고
발길을 돌리다 하는 넋두리 같은 것일 텐데,
어쨌든 시원섭섭하다.
민노당 당원증이 나중에 옥션에 매물로 나오면 수집 좀 해야 할까 보다.

싸우느라 고생들 했다.
87년 백기완 선생 선본 부터 해서 민중독자 후보, 민중당, 국민승리 21등등 해서 전위정당 부터 합법정당까지 어언 10년간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꿈 꿔웠던 범 PD파, 또 중앙이 등따신 양지에서 선텐할 때 신념하나로 가던길 쭉 가 온 ND파에 박수를 보낸다.
죽써서 개 주고 있다는 소리가 몇 년전 나오기 시작했을 때, 이미 조짐이 있었다만,
어쨌든 지난 10년을 고스라니,
"한별"만 우러러 보는 종북파에 바치느라 고생했다.

그런데 인정할 것은 그냥 인정해라. 노무현하고 NL이 없었으면 너네 진보 의회정치 죽 맛도 못 봤을 것이니까.
백일몽에서 깨어난 셈 치고 각자 갈 길 가던가, 여전히 진보누리, 레디앙 같은 인터넷에서 쌍욕들 해가면서 싸우는 재미로 살던가,
대학교 다닐 때 학습 좀 했고 화염병도 좀 들어봤다는 후까시가 먹히는 사람들하고 골방에서 팀플하며 렙업하는 재미로 살던가,
열린우리당 애들도, 유신 때 살아났다고, 전두환 폭압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전의를 추스리는 것 같은데,
그네들하고 비슷한 류의 뇌체조나 하던가.

다시 몇년전 과거로 돌아가기엔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다면,
한판 쉬어주는 셈 치고 총선기간 어디 꽃구경이나 가시던가.....

이야기가 야박하게 들리고 빈정거림이 불쾌하겠지만,
나도 너네들 만큼 NL의 그 끈질긴 생명력에 지긋지긋한 사람이니까,
그냥 5대 0 졸속 경기 끝에 패전한 축구 대표팀을 욕하는 어떤 축구팬의 분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보고있다 화딱지 나서 죽을 뻔 했다.
되지도 않을 싸움을 최악의 상황에 펼치는 너네들에 정말 환장하고 자빠지겠더라.
"장군" 사망 후 "유훈" 플레이하고 있는 NL하고 쪽수 싸움을 감행한 저돌성은 높이 산다만,
도대체 좌파가 NL에 그런 방식으로 승리한 적이 한국 운동 역사상 어드매에 있었나 묻고 싶다.
그네들은 "일당백" 천리마 운동을 절절한 "신심"에 품은 따라쟁이 "력군"들인데 하물며....
 
쪽수가 안되면 전략이라도 있어야지,
총선 전망 불투명하고, 지역위, 중앙위에서도 번번히 밀려가고,
그나마 대표선수 부재가 가장 큰 난관이었던 NL의 품에서
영길이 오빠 꼭두각시로 춤출때는 가만있다가,
열린우리당  빌빌하니 이삭줍기는 좀 가능 할지도 모르겠다고 숨죽이고 있다가.
문국현 나와서 판 헝클어버리니까 그제서야 말 보다 몸이 더 빨리 움직이더라. 

참다참다 팬티에 똥싼 너네들의 인내심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정말 "종북주의 청산" 밖에 그리 할말이 없던?
그게 정말 말이 되는 당내 노선 투쟁이냐?
멘세비키도 아니고 짜르, 파시스트 내통자가 당내에 있다고 설레발을 치면
너네가 어느날 갑자기 볼세비키 되냐?

종북주의자들하고는 한하늘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너네의 울부짓음이 공허한 것은,
여타 비당원, 국민들로 부터 "그러던지 말던지" 밖에 되돌아 올 답이 없는
너네의 그간 정치 활동에 대한 평가 때문이다.

사실 너네의 종복주의 청산 울부짖음은 열린당 노빠들이 실용주의 회색분자들,
호남 지역주의자들 때문에 "개혁세력"이 위기라는 논리와 별반 달라 보이지가 않는단 말이다.
노선 투쟁은 사람들이 몇번 버스 타고 있냐 논쟁도 아니고, 
우리는 "현대" 타고 쟤네는 "평화자동차" 타고 있다는 논쟁도 아니고,
그러니까 새로운 노선체계를 만들어가는 투쟁인데,
새로움은 없고 평화자동차 승객중에 몇명 내리게 하겠다니 그게 무슨 어이없는 싸움인가 모르겠다.
아싸리 권영길 정계 은퇴 운동이라면 또 모를까....
좌파 너네들은 정말 여전히 실전에 취약하다.
그것도 참 놀라운 일이다. 학습효과가 그리도 없으니.

신당모임의 모토가 "더 빨갛게 더 푸르게" 였던가?
처음엔 무슨 페인트집 광고줄 알았다.
환경운동은 이번 태안 사태도 보니까 좀 장사 될 것 같고,
맑스 한줄 모르고 겨우 장군님 교시나 외우고 있는 애들하고는 스타일 구기니까
신장개업 해보자고 결의한 것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없지 않은데,
그건 너네가 이념정당, 전위정당 포기하고 대중정당 노선 결의할 때,
사회당 아이들이 했던 거다. 왜? 사회당 아이들은 "꼴통 극좌파"라며 눈길도 안주더구만..

하여간 놀랍고 놀라워라다.
한마디로 비대위 이름으로 벌인 일이,  "타도 주사파"는 실패하고,
해체 민노당의 구호만 남게 한 것이고,
"저집엔 주사마귀가 들었다"는 흉가 소문만 내준 셈이지 않은가?

뭐 일이야 그렇게 되는 것이고, 내부사정 모른 놈이 더 이야기 하기도 그렇지만,

나는 일단 PD파의 "주사 알러지"가 여전히 똥된장을 구분 못하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기억 할려나 모르겠다만,
1992년에 김낙중이라는 아저씨가 간첩으로 안기부에 검거됐던 적이 있다.
민중당 공동 대표였으니까 이게 한참 민중정당 건설 운동 하던 세력들한테 아주 치명적이었는데,
진정추였나? 지금 민노당에 있는 주대환이,
올해 너네 좌파들이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했다.
성명서 내고, "북한은 남한 민중운동에서 손 떼라" 뭐 그러고,
김낙중은 우리랑 상관 없다 일단 선 긋고....

나는 그때 아주 충격 받았다. 할짓이 있고 아닐게 있는 데,
애들이 정말 삽질 하는구나 했다.
북한이 남한 민중운동에서 손떼라는 것은,
스탈린은 유럽 좌파운동에서 손떼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건 맞는 말이지만, 정치적 효과는 하나도 없는 말이다.
당시 안기부가 이미 충분히 반북교육을 했기 때문에 북한이 손만 떼면,
주사파같은 것은 안 생겨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또 북한이 남한에 삽질하는 것은 어차피 안되게 되어있다.
그건 미국이나 일본이 한국에 식목하고 개목걸이 다는 것하고는 차원이 틀리고,
91년 이후 제 살길도 힘들어진 애들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해준 것이라 할 수있다.
말 그대로 그냥 알러지 수준이고,
북한어를 대거 운동권 언어생활에 수입해 온  아해들에 대한 화풀이 밖에 없다.

내가 본 문제는 사실 김낙중 한 인간에대한 태도에 있었는데,
"집마당 항아리 아래 총 묻어놨다"던 그 노인을 마녀사냥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정치 도리같은게 있다면, 적어도 톤이라도 좀 정제했어야 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불구대천지수" NL 청산을 해보고 싶은 것 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국가보안법 문제도 있고 기본적인 사상의 자유문제도 있다.
당원 문제는 당기위원회에서 하는게 사실상 올바른 것이지,
인민재판을 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국 그래서 그당시 NL "x 됐다"고 고소해 하던 좌파가...
오늘날 다시 그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어찌 할 것인가?

이번에는 NL도 자기들은 안했다고 빡빡 우기고 있는 상황인데,
백번 양해하더라도, 그저 "해당 행위자"로 부르면 될 것을,
종북주의라고 규정해서 "너네 한번 죽어봐라"라고 하면,
상대방은 죽기아니면 살기로 기를 쓰고 달라붙을지 몰랐는가?
유럽 좌파정당이야 사회당이고 공산당이었으니까 스탈린주의 척결이 중요했겠지만,
그나마도 제명 될 때까지 기쓰고 안에서 게겼다. 차라리 반스탈린주의자 스스로의 제명을 택했던 것이다.

민노당은 당내 친자본주의 시장주의자도 상당수인 대중정당이다.
개네들은 당비 묵묵히 자동이체하니까 놔두고,
종북주의자들은 "손님"이 주인행세 하며 세간살이 목록표 보고했다니까
내쫒는 상황도 아귀가 안맞는 이야기다.

열린우리당이 분당할때하고 또 얼마나 다른 정치적 방식이 있었는가 묻고 싶다.
그나마 열린우리당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었는데,
신당은 도대체 뭐가 있는데?
대학교때 학습했던 먼지 쌓인 원전들과 문건들?

정말 환장 하시겠다.
"더 빨갛게 더 푸르게"는 나중에 그린피스 추종자들하고 한바탕 또 싸우시겠구먼.

좌파가 10년을 잃어버리던
보수 개혁파가 10년을 잃어버리던
그딴건 "직업 정치가"들의 운명이니 잘 알아서 하시거나 마시거나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치를 탈색시키는 일들은 제발 그만들 좀 뒀으면 한다.
너네만 옳다는 생각도 좀 버리고, 하다만 것이 전부인 싸움은 좀 그만하고,

NL이나 종북주의자는 그 정도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인정도 좀 하고,
NL이 좋아하는 "쪽수싸움"에 말려드는 것도 좀 그만 두고...
제발 좀 새롭고 쌈.박.한. 모습으로 새롭게 거듭나주길 바랄 뿐이다.
안타깝지만 좌파 너네도 세대 교체도 좀 해라. 징글징글하다.

잡설은 이만하고...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당원 한번 해보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
전위적 현실에 극한의 꿈들을 투자하는 새정치 세력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갓 쓰고 청바지 입고 기계체조하는 세력들은
종북주의자던 평등주의자건 둘다 제명하자고 덤볐어야 했던 것이 너네가 할일 이었다!

2008년 2월 3일 일요일

망각의 역사: Cancun 2003 WTO 투쟁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 나도 무덤덤하게 뉴스를 보고, "시끄러운 세상"에 등을 돌리는 소시민적 삶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칸쿤 여행 사진들과 감상기를 정리하다가 2003년 WTO 총회가 칸쿤에서 열렸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웹정보"들을 들여다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칸쿤의 휴양지에서 있을 법한 일이 있었던 것이라고 넘겨버렸을 뿐.

시애틀의 투쟁은 반 세계화 투쟁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고 이래저래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언급이 되는 것이지만, 칸쿤에서 벌어진 전세계 농민들의 WTO 농산물 협정 체결 반대 투쟁에는 그다지 "특별한" 시선이 가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활복자살로써 한국의 비참한 농업 실상과 전세계 농민의 분노를 표출했던 한국 농민, 이경해씨에 대해서는 정말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기억의 태엽을 되감아 보니, 서울 도심에서의 격렬했던 장례, 추모 시위와 그 얼마 후 홍콩에서 열렸던 WTO 총회에 전투적으로 참가했던 한국 대표단에 대한 보수언론의 공격이 떠올랐다. 이경해씨의 죽음이 만들어낸 "농업문제"와 "반세계화" 담론의 고양을 보수언론들은 한순간에, 한국 반세계화 시위대가 죽창을 가져가고 입국 거부를 당했다는 논리로 깔아 뭉갰었다. "나라망신 시킨다"며 말이다.
그렇게 전세계 신자유주의화의 대표적 희생자들인 전세계 농민들의 절규는 도시 소시민의 삶에 흠뻑젖은 이들에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 같다.

최근 뉴스를 보니, 그나마 존재하던 농업 정책지원 정부기관들이 이명박 정부하에서 민영화되거나 통폐합될 것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21세기 신자유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농민은 어떤 존재일까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날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농민들이란 어떤 사람들로 이해되고 있는 것일까? 밭을 갈아 엎고, 쌀가미니를 도로에 흩뿌리고,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심지어는 미래없는 삶을 비관하며 농약을 마셔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회. 고작 중국으로 동남아로  해외 원정 결혼을 떠나는 사람들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라는 노래를 부르던 "거리의 민주화"세대는 유기농 농산물을 사먹는데만 열을 올릴 뿐 정작 농민의 삶 같은 건 관심 없어하는 것은 아닐까? 하긴 90년대 초반 이른바 WTO의 전신이었던 우르과이 라운드 (UR) 반대 투쟁을 할 적에 대장정에서 나온 한 팜플렛에서 우르과이 라운드가 체결되면 농민이 대거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와 사회불안이 야기된다는 농민에대한 "잠재적 범법자"논리를 "진보"의 이름으로 펼쳤던게 기억이 난다. 이런데 쓸말은 아니지만, 자칭 맑스주의자라던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논리에, "학출 피디" 개놈들이라며 길길이 분개했던 것 같다. 차라리 "농자지천하지대본"이고 "신토불이"라는 농협광고를 들고 나온 오늘날의 "종북주의자"들이 더 나아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박정희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대규모 "산업예비군"을 확보하면서 그리 넋나간 소릴 해대지는 않았고, 그후에 잘살아보세 전두환으로 부터 노태우 시대에 본격화된 농공단지 조성 정책으로 농민을 "가두는" 작업도 상당히 이루어지던 그 시절에 그게 무슨 똥 된장 못가리는 망발이었단 말인가?
그 주장에 동조했던 자들중의 상당수가 지금 민노당에서 척결하고자 하는 "종북주의"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그들 또한 적어도 과거에 이미 "척결될" 존재였던 적이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이미 그때 학출운동권의 다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이었으니까  농민의 삶이 어찌 된다는 것보다는  자기들  생활 공간이 위태로워지는게 정서적으로 더  긴급한 문제였을지도 모를일이다. 농활을 MT가듯 가기 시작했던 시기였으니까... 

IMF 시기 한국의 노동자들이 "I'M Fired!"라는 티셔츠를 입고 투쟁했던 모습이 미국의 많은 학자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사실 아무도 한국농민들의 칸쿤과 홍콩에서의 투쟁을 기억하지는 않는 것도 같다.
이경해씨가 생전에 울부짖었던 "WTO Kills Farmers!" 라는 구호는 "신자유주의"를 논하는 아카데미 내부에서마저도, "해프닝" 혹은 "불가피한 희생"등등의 논리속에서 파묻혀버렸다는 생각도 들고....

한국 농민의 피로쓰여진 칸쿤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좀 쉬어야겠다고 떠났던 내 여행의 흔적들이 몹시나 부끄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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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의 반세계화 시위에 참여하던 생전의 이경해씨




이경해씨 글 (추모 페이지)   이경해씨 관련 WTO 투쟁 기사 (민중의 소리)  : 이경해씨 추모 홈페이지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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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당시 서울 거리시위 - AFP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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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칸쿤- "이경해를 기억하라!"


농민 이경해의 이름이 보인다. (그린피스 리포트 참조)



2008년 2월 2일 토요일

Cancun - Downtown

해 저문 밤길에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별하나 보고 예수를 찾아 갔다던 동방박사들은 참으로 대단한 여행자들이었는데,
예수를 보고나서 새벽길을 다시 떠났는지 낮길을 떠났는지 조금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석가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좀 했던 것도 같은데, 예수는 말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을 보면,
별로 오래 체류 할 이유도 없었을 것도 같고...
어차피 유다왕을 경배한 죄를 지은 터에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없어, 다른길을 떠났다고 하던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다운타운 중심부 (El Centro)에 내리긴 했는데, 정신없이 달려대는 차들,
간판들과 비슷비슷한 건물들이 뿜어내는 불빛들 속에서 "여기가 아닌가벼"를 속절없이 되뇌었다.

Cancun 시내 지도 (구글 어스 지도는 구름낀날 찍은 것인데다가 화질도 떨어진다.)
호텔존에서 다운타운을 잇는 R-1 버스는 Tulum Ave. 를 관통하고 그곳이 시내 중심부를 이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기여서, 그나마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곳으로 일단 발길을 재촉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칸쿤 시청이었다. 나도 어쨌든 별단 나무를 보고 길을 찾은 것이니 동방행자는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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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 시청앞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는 무대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공연이 없었던지라 아이들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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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건물과 트리


매우 부끄러운 사진이지만, 저 동그란 뿔달린 구조물이 다른 곳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좀 처럼 보기 힘든 "별" 조형물이다. 사실 별똥별에 가까운데, 자세한 상징적 의미와 조형미적 기원은 나중에 좀 찾아봐야 겠다. (아는 사람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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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정문 위에 세워진 아기예수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시청인줄 몰러선지 건성건성 보는 습관 때문인지, 어쨌든 "저건 무슨 떡방아 조형물일까?" 하고 생각 했었드랬다. 가끔 내 황당한 상상력에 기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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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que de las Palapas


시청 반대쪽이 중심 상가지구인데 그 곳에 넓은 광장이 있다. 정보에 따르면 이곳에서 매주 금요일 밤 무료 음악 공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거창한 공연은 아니라도, 멕시코 첫날 거리의 마리아치라도 보고 싶었지만, 한가로이 산책하는 사람들과 대낮인 줄 알고 뛰노는 아이들만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멕시코 아이들은 어렸을 때 참 열심히 뛰노는 것 같다. 우리내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놓아 주지 않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그래서 남미 축구가 기초체력이 튼튼한가?  개인기도 대단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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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옆 성당


광장 옆에 조그만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평일 저녁에도 사람들이 옹기종기 않아 미사를 보고 있었다. 거리로 문을 열어 놓은 개방적 구조가 무척 맘에 들었다. 위압적인 첨탑도 없고, 붉고 푸른 십자가가 아닌 하얀색 십자가가 모자 정수리(이런말이 있나?)마냥 붙어있는 것도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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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옆 식당


사람 마저 드문드문한 광장을 뒤로하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광장주변 식당을 배회하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결국 광장 바로 옆에 이러저런 "특별세트 메뉴"를 대문짝만하게 광고해 놓은 식당안에 들어갔는데, 가격도 음식맛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뭘 먹었더라? 그런데? 중심가에서 식당안에 들어가 저녁을 먹는 것도 개인당 $10 정도는 생각해야한다는 깨달음을 갖게된 순간이기도 했다. 식당안에 마리아치도 영업 중이었고, 넓은 정원이 있어서 무엇보다 내가 미국을 벗어나긴 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