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21일 목요일

하얼빈

인터넷에 글쓰면서 공들일만한 열정이 아직 내겐 없는데도 자꾸 인터넷을 비집고 들어오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른데 써놓으면 우연히 다시 보게 될 확률 조차도 극도로 떨어진 다는 사실. 사실 무슨 비밀도  아니고 지갑속에 꼬깃꼬깃 접어 넣을 비상금도 아닌터에야 그게 뭣이 되던 별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각설하고, 하얼빈에서 나는 뭔가 적어 볼까 하려던 참이다.

Exodus 2006. 12. 18 (+- 1)

뭔 짓을 한 것이었을까? 나는. 

싸구려 와인은 다시 한번 내 삶을 얼룩지게 했다.

다행이 모든 것이 어긋난 출발 선에서 포기를 배운 탓인지.

24시간 꼬박 걸린 여정중 20시간 정도를 두눈 질끈 감고 버텨낼 수 있었다.

...

그렇다손치더라도....
...

다음날 인천공항에서의 쌩쇼는 해도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그 300위안만이라도 꿔주라던 경상도 아저씨는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었을까?

세상과 삶이 합의서를 찢고 나니 남은 건.

좌충우돌.

추락하는 날개 없는 것 아래 가끔 매트리스도 깔려 있다는데

다시한번 경배를!



Landing 2006. 12. 20

안개.

아. 대기 중에 이 연탄가스 냄새는 또 무엇인가?

누구는 인천공항에 몇년만에 내리자마자 "섹시한 입자"들을 코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던데,

나의 하얼빈 첫 숨 한 모금은
칠흙같은 안개속 저편에서 10억이 연탄구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었으니.

영하 15도. 하얼빈의 밤공기

그렇게 코 끝을 얼얼하게 했다. 

잠깐 중국 남방항공 기내식 평.

쌩소시지가 나오는 기내식은 압권이었음. 알고보니 하얼빈이 쏘시지가 유명하다고.

그래도 어쨌든 쏘시지가 빠다도 못 만난 설정은 짐짓 당황스러웠음.

그나마 맛은 먹어줄 만. 시장이 반찬이니.

2006. 12. 21 하얼빈 송하강. 중앙대가  

하얼빈 짱!

오~ 이런 도시였다니.

하얼빈 중앙대가를 한번 걷고 나니,
이 도시 매력있다.

아시아에서 러시아를 만나는 이국적 정취란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더군.

중근 동지도 그래서 콧수염을 길렀던 것일까?

어쨌든,

우리내 선조들 "말타고 개장시" 하던 만주 벌판이라더니.....

꽁꽁언 송하강변에는 말도 있고 개들도 있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힘이 중국 도시 계획자들의 스케일을 이리도 키워 놓았을까?

하긴 하얼빈은 도시의 심장이 러시아와 유태인들의 작품이었다니 중국에 질문을 던지는게 적절치 않을수도.

듣자하니 북경이나 상해도 이렇다는데.

도대체 이 모든 것을 그저 문드러진 표현, "대륙적 기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까?

아.

도시 중심부에서 뿜어져나오던 압박감에 짓눌려 잠이 안 올 지경이다.

는건 오버지만,

중국을 이제서야 와 본 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 던 건,

지난 여름 어느 미국 학자가 농담처럼 했던 "베트남이 중국만큼만 됐으면 좋겠다"는 불가능한 언설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

사회주의적 집중과 종합의 포스란!

보따리채 들고 온 페이퍼를 이런 도시적 유혹과 흡인력에 맞서 끝낼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하다.

오늘은 베이징으로!

2006년 12월 13일 수요일

What is to be done ?

굳이 거창하게 레닌의 글 제목을 쓴 것은 우연히 인터넷을 떠돌다가 레닌과 관련된 포스팅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자.


191. 철거되는 레닌 동상
(월간 말, 1991년 10월호)

노동자들에 의해 철거되는 레닌 동상.
1991년 8월 29일, 소련최고회의는 소련 전역에서 공산당활동을 정지시키는 결의안을 찬성 283, 반대 29, 기권 52표로 통과시켰다. "당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계급의 전위이지 않으면 안된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훌륭한 모든 분자들, 그들의 경험, 그들의 혁명적 정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헌신성을 흡수해야만 한다. 당이 진정으로 전위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당은 혁명적 이론으로, 운동의 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혁명의 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레닌주의의 기초])는 소련공산당이 해체되었다


지금 나는 현실적으로 내 기말 페이퍼를 위해선 레닌보다 백만배는 유용해 보이는 학자들의 글 뭉치들 속에 싸여있다.
왜 대체 르페브르는 알다가도 모를 언어로 두리뭉실 동어반복을 해댔던 것일까? 내가 수업시간에 "홈디포 안에서 집 짓기" 하는 놈이라고 무례한 언사를 퍼붓었던 도날드 무어는 어느새 내 옆에와서 내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 있다. 이거면 됐어 하고 무릎을 쳤던 호주 아저씨 윌리암 로건의 글들은 빠진 머리 카락들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고....

도대체 나에게 계획이란 집 나가 영영 돌아 오지 않은 탕자인지, 아니면 애초에 담너머 그럴싸 해보이던 옆집 감나무같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말 그대로 "데드라인"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아 여기서 위기 극복 필살기, 시간연장의 호리병을 던지는 인터내셔널 스튜던트가 될 것인가 말것인가? 답답할 따름이다.

잠도 안 재우고 니코틴 카페인으로 몸은 절여가면서도, 자꾸 마우스로 도망가는 오른손은 내버려두는 이율배반은 어쨌든 끝내야 한다.  

2006년 12월 1일 금요일

[펌 + 삐딱하기] 나쁜명사?

이런 놈들이 좀 어이없다.
메신저로 한 참 인터넷 쇼핑 이야기하다가, 컴퓨터를 끄고 다른 곳에서 가서 접속했더니 메일이 와있다.
제목 "읽어봐라..."다.
풀어쓰면 "요거 쓸만하다. 너 한테도 피가되고 살이 될 주옥같은 글이다."
처음 쓰윽 읽었더니 그럴 듯하다.
제법 언어학자분 하시고, 들뢰즈 냄새도 좀 나시고, 하여 먹물 향기도 그윽하고,
"문화평론가"로서 "젠 체"도 나름 독자를 압박하는 그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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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디토/

주제; 나쁜 명사(名詞)

* 발문/ ‘경찰력 투입’을 ‘공권력 투입’, ‘사회지배층’을 ‘사회지도층’으
로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경제적 사실을 미학적 가치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경우이다. 좋은 명사의 나쁜 사용, 사실을 당위로 돌려놓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 위계화의 욕망이란 좋은 명사에 무임승차하고 나쁜 명사를 남에게 돌려놓고자 하는 지배의 기술일 뿐이다.

남재일/ 문화평론가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인디언의 이름은 독특하다. 추장은 ‘머리 속의 바람’, 제사장은 ‘새 걷어차기’, 백인 남자와 결혼하는 여성은 ‘주먹 쥐고 일어서’이다. 이름에는 새로 태어난 생명의 미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 ‘머리 속의 바람’은 평원의 고단한 삶을 이끌어가는 부족장에게 요구되는 지혜, ‘새 걷어차기’는 날아가는 새도 이단옆차기로 떨어뜨리는 제사장의 신통력, ‘주먹 쥐고 일어서’는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소속돼야 부족에 잔류할 수 있는 인디언 여자에게 요구되는 질긴 생명력을 염원하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자연친화적이고 시적인 작명법인데, 영화를 볼 당시는 왜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인디언의 이름은 사람의 동작이나 자연의 한순간적 상태를 묘사한다. 이건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가정한다. 삶도 순간성의 사건이다. 이들의 이름은 기꺼이 자연의 한순간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한다. 이런 작명법은 무엇이 되고자 기원하는 자동사형이다. 우리의 작명 관습은 무엇을 갖고자 하는 타동사형에 기초해 있다. 염원의 대상은 명사의 형태로 제시된다. ‘정숙(貞淑)이’는 단정하고 맑은 여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인데, ‘정숙’(貞淑)이란 추상명사를 목적어로 두고 이 상태를 염원한다. 그런데 정숙(貞淑)은 자연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적 가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숙을 욕망할 순 있지만 정숙이라는 존재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작명관습은 가치라는 관념을 추상명사 형태로 축적한 문명화된 사회의 일반적 행태다. 아예 추상명사가 부족한 원시 부족한테 자동사형의 작명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니 인디언 이름에 대해 터져나오는 반사적인 웃음은 사실은 명사형을 욕망하는 현대인이 동사형으로 행동하는 고대인에게 보내는 야유일 터이다. 발달된 사회일수록 명사가 풍부하다. 삶의 모든 경험과 정신적 생산물들이 결국은 명사라는 창고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고에 이런저런 물건을 쌓아놓다보면 그중에 불량품도 있게 마련이다. 정신의 창고를 좀먹는 나쁜 명사 중에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된 말만 꼽아봐도 ‘전과자’, ‘이혼녀’, ‘지방대 출신’, ‘코시안’(한국인과 아시아인의 혼혈), ‘편모’ 등 숱하다. 이런 유형의 명사는 과
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현재의 속성으로 고정시켜 하나의 범주를 만든다. 범주화의 동기도 처음부터 위계화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이혼녀’라는 명사가 별도로 범주화되는 것은 노처녀나 유부녀와 구별하고자 하는 위계화의 욕망 때문이다. ‘지방대’, ‘코시안’, ‘편모’ 등도 비주류로 총칭해 배제하고자 한 욕망에서 발생한 범주들이다. 소통의 효율을 위해 이런 말들이 불가피한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경우도 위계화의 욕망이 없다면 얼마든지 다른 표현으로 대체 가능하다.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나쁜 명사는 그 안에 포함되기를 다들 꺼린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소유권을 주장하는 명사도 있다. 돈 좀 있고 자리 높고 발언권있는 ‘사회지배층’을 언론은 종종 ‘사회지도층’이란 작위로 부른다.
노사분규현장에 경찰이 투입되면 언론은 ‘공권력 투입’이란 제목을 애용한다. 공권력은 행사되는 추상적 힘이지 투입되는 물리적 힘이 아니다. ‘경찰력 투입’을 ‘공권력 투입’, ‘사회지배층’을 ‘사회지도층’으로 표현 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경제적 사실을 미학적 가치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경우이다. 좋은 명사의 나쁜 사용, 사실을 당위로 돌려놓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위계화의 욕망이란 좋은 명사에 무임승차하고 나쁜 명사를 남에게 돌려놓고자 하는 지배의 기술일 뿐이다.
종종 파괴적인 것은 창의적이다.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찬 나쁜 명사들을 파괴하는 것, 범주화와 위계화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 그건 명사로 규정하지 않고 인디언처럼 복합동사로 오래 움직임을 지켜보거나 움직임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 한다. 이 창의성의 명명을 인디언 식으로 하면, ‘나쁜 명사 깨고 복합동사와 춤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창의성은 수시로 포장지를 갈아치우는 기술이 아니라 포장지를 찢어발기는 파괴적인 계보학적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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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시한번 생각해 보니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귀차니즘의 화신이 왜 이런걸 손수 포워딩을 했을까 생각을 하니 슬슬 짜증도 나기 시작한다.

인류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남재일씨의 논지는 Spir-Whorf Thesis 라고 불리우는 오래된 정리에 기반하고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 언어 사용 운동을 전개했던 미국의 한 "계몽"운동과도 닿아 있다. 뭐 한국에도 "바른말 고운말" 운동도 없지는 않다.
사족이지만, 나 "국민학교" 다닐때 매일 종례 때 욕한 사람 고발 시간이 있었다. 욕했다고 걸리면, 벌점을 받고, 자기가 한 욕을 열번 남들 앞에서 복창했어야했고, 잘 기억은 안나지만 매도 좀 맞았던가? 어쨌든 체벌이 있었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 당시에도 많은 나쁜 말이 있었음에도 (예를들어 좆만아, 씨발, 개보지, 호로새끼등등) 보고가 된 것은 "새끼야" "염병" "자식"등등 아주 순화된 것들이었다. 애들이 착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이 자식아"를 대체 욕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나쁜말로 판결이 났는데, 언어적으로 보자면 이처럼 나쁜말의 기준은 발화자와 청자의 감정적 상태를 기준으로 하기도 한다. "이 자식아"는 나쁜 감정적 상태의 표현이고 "듣는 자식 기분나쁘기" 때문에 욕이 되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평론가 남씨"가 어쨌든 정치와 미학의 문제까지 두루 한국어를 통해 다루고 있으므로 이야기해보자면, 가장 처절했던 "언어투쟁"의 역사로 노동절 쟁취투쟁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있다.

"근로자"라는 말을 버리고 "노동자"라는 말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야했는지 이제 기억하려는 사람도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사람도 이젠 없어져 가고 있는 듯 하다.
"위안부"라는 말은 또 어떤가?

그런데 그래도 남씨의 논지는 불편하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나쁜 명사들의 효과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안하는 바, 복합동사로 "파괴적 창조성"을 그려보기엔 언어적 경제성이라는 문제도 만만치 않다. 솔직히 그가 말하는 복합동사가 뭐 그리 대단한 기획까지 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그가 말한 공권력과 경찰력의 구분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반드시 그가 말하는 효과를 생산해내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저항의 측면에서 보면 공권력이라는 추상명사가 경찰력이라는 구체화를 통해서만 해체가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경찰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것을 경험한다. 어떤 경찰력의 사용은 공권력의 잘 못된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비판당한다.
시위현장에서 파업현장에서 시민과 노동자들은 경찰력과 "맞짱"을 뜨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잘못된 사용과 맞서는 것이고 실상 전선은 그 선에서 형성되고 정치는 또 그 자리에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한 언어의 사용에 대한 강조는 사태의 "객관적" 파악이라는 신화속에서만 그 유용성이 발견될 뿐이다.
문제는 정확한 언어라는 것은 없는 것이며 당파적 언어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짭새가 들이 닥쳤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꼭 반드시 경찰이 들이 닥쳤다고 써야하나 이럴 때도?
기자들은 이런 경우에 "경찰"로 번역을 하기도 하지만. 내 경우엔 이런 번역기의 작동이 문제다. 언어가 문제라기 보다는.

좀 더 직접적으로 좋고 나쁜것의 이분법적 사고는 그 자체가 이미 억압적이다.
그런 언어가 이미 존재하다기 보다는 어떤 "용례"가 나쁜 효과를 만들어낸다.
걸레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자. 걸레도 명사다. 다시 말해 사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걸레라는 말을 사람에게 사용할 때 그것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된다.
이렇게 언어라는 기표가 가지는 환유가능성 때문에 언어는 "정확도"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뉴욕보고 아무도 사과를 떠올리지는 않지만, 빅 애플은 뉴욕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는 미국을 보라.
남씨 아저씨가 사용한 아메리칸 인디안 (요것은 정말 나쁜 표현이다. 심지어는 미국이나 아메리칸도 빼먹었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인도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붙인 "명사"아닌가? 의도적 오인이 더 문제적인 것 아니겠는가? ) 사례도 추상명사가 없다고 하지만, 환유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지를 통한 용감함은 가끔 부럽다.


발전된 나라엔 명사가 많다는 사전학자류의 일반화론에 이르면 이글은 사실 좋은 글인체 하는 나쁜글이기까지 하다. 남씨 방식으로 말하면 한글은 상대적으로 아주 저급한 언어다 그 자체로서. 한국은 저발달된 나라고. 한글은 명사보단 형용사가 발달했고, 동사군은 민망하리만치 빈약하기까지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신조어군을 좀 살펴봐라. "장애우"라는 표현은 "애자"랑 링에서 그나마 혼전을 보이는 듯 했었으나, 그 자체로서도 문제적이까지 했지 않은가? 한편 작명 컨테스트의 작품이었던 콘돔의 한글명 "애필"은 또 얼마나 코믹했나?

독일철학(근대 서구철학의 근간을 이루는)에서 Sein 동사가 가지는 근본적 권위를 생각해보면 명사가 없다고 덜 발전한 국가라는 일반화는 언어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설명이 안된다. 오히려 동사군에 세계관은 더 많이 반영되기도 한다.   

명사에 대한 패티쉬는 단지 상업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물동량" 수준에서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논지다.
선언적 포장지 찢기가 감동적인 언사이긴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럴싸한 "장바구니"의 고안과 개인 휴대성을 제고하는 문제 아니겠는가?

삐딱해지기 시작하니까 한도끝도 없고, 머리가 아파서 더 못 쓰겠다.

제발 논술시험 준비하는 우리내 아이들은 이글을 읽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말 빨과 글 빨을 내세우는 문화평론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냉정하게 남씨 아저씨에게 말하자면,
그런 "평론"의 계보학을 찢어발개는 노력이 더 필요하신게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유토디토는 무슨 외계어인가? 개뿔! 


2006년 11월 29일 수요일

Sadistic ? Too vulnerable.

왜 그럴까? 왜 그럴까? .... 이런 질문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어떤 일반적 추상이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레베카의 마지막 수업에서 기말 페이퍼에 관한 그룹 워크샵을 하는데, 내 코멘트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로리엔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코멘트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줄로만 알았는데, 조금 지나니까 그 이상이다.

결국 자기글이 말이 안된다는 것 아니냐고, 너네들이 괜찮다고 했던 것-미국에서는 다들 처음에 부드럽게니까-은 거짓말 아니었냐며 서럽게 울어버린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내가 큰 잘 못을 한 것 같은 상황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로시오와 아리엔이 수습에 나섰고, 로리엔은 얼마 후 안정을 되찾았으나, 나의 황당함은 여전히 남게 되었다.

전에도 한번 썼지만, 내 영어가 짧아 전후좌우 다 짜르고 요점만 간단히-이마저도 버벅거리지만-하다 보니 내 말투가 대단히 위협적으로 들리는 것은 나도 이해를 하겠다.
말도 못 하는게 자기 글에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하니 더 비참해 질 수도 있겠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한국의 대학원에 유학 온 동남아 학생이 문법에도 잘 안맞는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네글은 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한국의 대학원생들이 진지하게 그 코멘트를 받아 들일지는 뻔하다고 볼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도발을 한 것일 테다. 그래도 어쩔 것이냐, 천성이 그런데. 내가 무슨 봉건 왕조체제, 식민지 체제에서 공출 당해 온 사람도 아니고, 말은 못 해도 몸이라도 써주고 얼굴 근육이라도 움직여가면서 느낌을 전달해 주는 것이 그래도 일정하게는 동료의식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가끔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가 이른바 북아메리카 여인네들을 "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8년에 캐나다에 있을 때, 학원의 여선생이 너무나도 정신이 없어보여서 수업시간에 좀 문제를 제기했더니-내 딴에는 다른 애들을 대변했다고 생각했는데-그 여선생 갑자기 강의실을 뛰쳐나가 학원 화장실에서 건물이 무너져라고 소리를 지르면 꺼이꺼이 울어댔다. 그때의 민망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과 동기로 부터 위협적이란 소리를 들었고, 오늘은 또 한 여자가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내말 다음에 어쨌든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쓰면 무슨 내가 새디스트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난 별로 그런 SM 플레이 관심없다.

어쨌든 이 북미의 여인네들과 나의 묘한 관계는 내 입장에서 보면 그녀들의 비정상적 자기방어 감각과 내 어이없는 영어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나는 더더군다나 미국식 립서비스, 사기진작 (Encouraging 을 뭐라고 해야하지?) 방식의 비판과 코멘트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항감조차 가지고 있다.

아닌 것을 아니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정상적 소통관계는 사실 서로를 좀 먹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백배 양보해서 그러한 미국식 배려와 칭찬, 그리고 북 돋아주기는 개인에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하는 에티켓으로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은 인신공격은 아니지 않는가? 무지는 비웃어도 사람은 비웃지 않는 것이 내 입장인데 좀 처럼 그러한 구분선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자리는 없나 보다.

네 글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 이러한 이론들을 한번쯤 고려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게 도대체 무슨 삶의 "낭심"을 걷어찬 반칙을 한 것이라고 그러는 것일까?

환장할 저녁이다.  

** "그녀들"이라고 범주화 시킨 것이 부당하고 골속에 박힌 섹시스트적 발상이겠지만,
    뭐 또 "탈마초"적 "건강함"이 여기서 문제이진 않은 것 같다. 

2006년 11월 27일 월요일

전세계인을 맘 껏 벗기는 Spencer Tunick

가장 많은 사람을 벗게 만든 사람을 뽑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박정희, 전두환 계열의 잔혹한 독재자도 아니요 "작업의 천재" 카사노바 계열도 아닌,
바로 이 사람,
끊임없이 해외토픽란을 장식하는,
미국의 사진작가 Spencer Tunick 이 아닐까 싶다.



해외토픽에서 간간히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이 사람의 실체와 작업을 직접 보게 된 것은,
며칠전 새벽 무심코 켠 텔레비젼에서 그의 작업에 대한 다큐멘터리 Naked Body 를 보면서였다.

"오~ Naked"
누가 쉽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눈을 감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거나 두손을 모으고 생부아닌 그들만의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코메디가 적성에 맞지 않는 이상,
어느새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몰입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오 호~"


그러나 HBO의 삼부작 다큐멘터리의 하나인 이 필름은,
Spencer Tunick의 단순한 전세계 "누드 출사" 기록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

"예술"의 세계는 항상 "포르노"의 현실과 거리를 꼭 이렇게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불편한 논리이지만, 설득의 논리는 필요하므로, 많은 에로영화 감독들도 그래왔듯 그도 최소한의 논리적 항변은 필요했을 것이다. 고발과 고소도 만만치 않고 그것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Sexy"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라, "Artistic"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강변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을 스스로 "아담과 이브"라고 믿게 하는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벗기기 성공스토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뭔가 다른게 있었다. 육체에 대한 그 나름의 철학.
De Certo의 논지를 연상케 하는 그의 철학은 고정되고 확실한 것으로 자리하는 경관에 대한 육체의 개입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역사적이고, 상징적이며 하여 육체를 왜소하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건물, 성상, 거리등등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억압에 대한 육체적 저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에 대한 긍정,
볼품없어 하는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긍정성의 복원이 그의 기획에 핵심 모티브였다.

그러나 아마도 모든 누드 작가들에게 이런 논리들은 이미 교리일지도 모른다.

내 느낌엔 적어도 그는 철학자이기엔 카메라 뷰파인더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먹고사는 문제와 젊은 작가로서의 명성에 대한 집착같은 것도 그를 "교리 공부" 우등생에 머무르게 했는지도 모를일이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이 상파올로 비엔날레에 초청 받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런 심증을 강화시켰다.

어찌되었든 얼떨결에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지루해"하지 않고 보게 된 것은, 구 소련에서 그가 진행 한 작업에 대한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좌파 멜랑꼴리아"를 자극했달까?




다른 지역에서의 자발적 지원자들과는 달리 구소련에서 그는 상당수 모델을 직접 설득 해야만 했다.

그 중 박물관에서 일하는 한 여성의 의문과 주장들은 역사적, 사회적 몸에 대한 의제들과 맞닿아 있었다.

그녀는 이를 테면,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성적인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당신이 찍은 사진을 본 사람들(러시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발가 벗은 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성적 의미를 생산한다."

벗은 사람과 벗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육체들이 나뉘는 것은 새로운 구획의 생산이다.
심지어는 죽은자들에게 조차 수의를 입히는 세상에서,
단지 삶의 생성의 자리에서만이 누드는 허용되어 있을 뿐이다.
하여 비생산적인 나체는 그 자체로 끊임없이 비윤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지거나 그 자체가 "상품"이 되는 한에서만 용인된다. 그 조차도 "더러운" 상품으로 종종 치부되어지지만.

사실상 누드 모델들은 대개 이미 "자신만만" 몸뚱이들이다. 적어도 그래야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
조각같은 육체. S라인과 8등신의 몸뚱이만이 벗을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통사람의 누드라는 Spencer 의 기획은 "몸 정치학"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구소련체제에서 "국가의 몸"으로써 자신의 몸을 인식하는데 익숙했던 한 남성의 누드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자아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실천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서야 내 자신의 몸을 되찾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들이 그 모든 의미를 생산하기엔 또 한계가 있지 않나도 싶었다.
그의 "작업"은 몸뚱이들을 다시 재배치하는 작업이므로, 주체들이 스스로 원하는 곳에서의 벌거벗기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배경"에서의 벌거벗기 임으로 "작품"의 형식 속에서의 소외는 문제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 활동 기저에는 이미 공공노출의 지난한 역사가 놓여져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미국식 전통의 센세이셔널리즘라 치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정 "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다면, 몸의 "대상화"를 해체하는 창조적 실험정신이 필요할 것이었다.
"몸"은 이미 충분히 "도구"적이니까..

사족하나, 다큐멘터리를 쭉 보면서 느낀 것인데, 왜 작가인 그는 옷을 벗지 않는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더라.
"발기"를 걱정해서인가? 모델들과 작가의 차이를 생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발랄한 사진작가라는 혐의를 떨쳐버리지 못할 구석이 곳곳에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2006년 11월 25일 토요일

편지 하나

** 누나 읽어 보았습니다.

저, 메일 받았는데요 . 반송이 되었었나요?
B 형은 같이 살고는 있으나 , 제가 별로 아는게 없으니 직접 소식을 들으시는게 누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같네요.  ^^

사실 첫번째 메일을 받고 몇자 끄적끄적 했었는데요 . 수업시간 전이라서 마무리도 못했고 입장이랄까 이런것도 애매하고 해서 어딘지 모르지만 드래프트박스에 들어가버렸던 같습니다. 추수감사절이라 도서관도 문을 걸어 잠그고 저도 별로 "" 하고 싶지 않으므로 느낌들을 풀어 놓아 볼까 합니다. (솔직히 좀 어설프게 마신 술기운이기도 합니다. 초롱초롱해져서..ㅎㅎ)

첫번째 메일을 받고 제가 쓰던 메일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 결정" 이다라는 였던 같습니다. " "이라는 앞에 "차라리" 혹은 "결국은 " 자리다툼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둘다 차이를 만들지는 못하겠더군요.


세미나
계획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이긴 한데요 .
굳이 제  관심의 단편을 꺼내보인다면 , 같은 경우에는 Properties 자체에 보다 관심이 몰려 있는데 , 기본적으로 소유물이라는 사물의 특정 형식이 사물과 권리의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구요. 중첩되는 권리 효과 ( 심지어는 사물 자체의 존재적 조건으로서의 권리) 비밀은 독특한 존재적 형식에 끊임없이 기입된다는 가정때문입니다. 권리 행사의 매개였다가 권리보증의 기표였다가 권리 충돌의 장이기도 하니까요 . 보다 직접적으로 저는 상품의 형식으로써 소유물에 접근해보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교환가능성 , 다시말해 최소한의 가치생성의 가능성을 전제로 해서만이 소유감각 내부로 사물의 정렬이 이루어질 것이다는 가정때문입니다. 환경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아닐까 싶습니다만.


다른
관심은 하나는 " "라는 관념 혹은 감각에 대한 것인데요 . 그것이 사회적으로 "잉여 "라는 일시적 우연적 상태와 " 과잉"이라는 지속적 욕망의 순환이 교차하는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삶과 세계에 대한 윤리적 담론들 또한 스며들기도하구요. 그러니까 "가진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 " 부터 "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까지 자체를 대상적(소유물을 통해) 으로 구축하는 어떤 논리들에 대한 관심이지요. 부의 규준이   소유물의 총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딜레마에 대한 관심이기도 합니다. 저도 개념적으로 최근 수업들과 몇몇 최근 맑스주의 독본들을 통해서 새로 관심을 갖게된 것이라 더이상 설명하는 것은 감당이 안될 같네요.

지난 여름에 베트남에 있을 포드재단이 후원한 "배급경제의 시대" 라는 전시회에 갔었는데요. 맑스가 제창한 사적소유의 철폐를 집단적소유로의 대체로 밖에 이해하지 했던 제한적 상상력의 역사는 결국 삶이 항상 위대하다라는 눈물나는 휴머니즘의 반복이더군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시기를 힘들고 암울하게 묘사하고 현재의 이른바 " 시장경제체제" 긍정하면서도, 내러티브 내부에 이질적으로 스며있는 "공유" 대한 향수 그리고 그것을 통한 현실부정이었지요. "그래도 그때는 내것 니것이 없었다" 라던지 "가진자 없는자라고 해서 지금 처럼 나뉘지 않았다"같은 이야기들 속에 말이지요 . 그런 향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물론 현재의 삶에 뿌려 향기나는 향수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신경증이 도지던데요 .사실 베트남의 경우에 배급경제 내부에 50 여개의 배급 차등 등급이 있었고 , 하여 부의 차등이 오히려 철저하게 구조적으로 행해졌던 것이었으니, 그때는 내것 니것이 없었다같은 말은 그들이 테레사 수녀였다가 지금은 집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그고도 밤잠을 설치는 아줌마가 되었다고 자성하는 것이 아닌이상, 사실 별로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성찰성의 외재 화랄까. 오히려 " 동란 " 기억하는 한국의 내러티브들과 겹쳐놓고 보면 삶의 비정상성( 현실에 파악되는 ) 대한 일시성과 찰라성에 대한 도덕적 자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벤야민이 언급한 "좌파 멜랑꼴리아" 동종이상에 다름 아닌 같구요. 결국은 어떤 수준에서 사회주의 배급경제는 소유감각을 흐트러 놓는데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얼마간 성공했으나 새로운 소유감각 혹은 반소유감각을 생성하는데는 실패했고 , 어미를 뺏어가면 근친상간은 안일어 것이라는 류(국유화)의 정치적 실험을 상당히 진지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셈이죠.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A형
글에 대한 **누나의 자세한 논평 보았습니다 .

제가 틀리지 않다면, 지난번 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연장선상에 있는 같네요.

제가 기억하기엔 술자리에서 A형이 이글을 특수한 목적-한국역사연구회 였나보군요- 위해 글이라고 했던 같습니다 .

제가 글을 읽기는 힘들 갈구요. 물론 노력하면 안될 것이야 없습니다만, **누나가 자세한 발제겸 평을 해주신데다가, 안타깝지만 제가 범접하기 녹녹치 않을 같기 때문에 지금은 제가 전에 발표문과 발표를 보고 느꼈던 점들만 간략히 덧붙이고자 합니다.

**누나완 다르게 저는 사실 A형이 충분히 아줌마들 사이에서 명사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는데요. 튼실한 허벅지 때문이 아니라, 순진하게 들리겠지만 요즘 주말 농장도 가고 아이들 데리고 생활사 박물관 민속박물관가는 교육받은 전업주부들도 (아줌마가 그런 뜻이라면 ) 많으니까 말이지요. 사실 A 글은 형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식민지 조선식 막모관행 " 행하고, 보고 싶은 현재적 욕망에 아주 폭넓게 열려있는 것도 같습니다 . 정조식과 막모가 뭔지도 모르는 저같은 사람의 지적 빈곤의 유희도 있으니까요. 사족이지만, 네이버에서 정조식을 치면 제법 자세한 하지만 알다가도 모를 설명이 나옵니다. 한데 막모를 치면 북한어로 "허튼 " 라고 간략히 나오더군요. 북조선에서 조선식 농속의 하나인 막모를 " 허튼" 모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자가 다를지도 모르겠군요.(한자가 같다면 참으로 재밌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여간 그것을 보고 나니 뭔가 이해의 고리가 꼬여버렸네요.
다시 돌아가서 , 재미나 관심의 문제가 소재나 주제적으로 A 글에 없는 것은 아니지요 . 그런데 뭔가 독자들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면 아무래도 **누나가 지적한 부분들이 타당할 합니다 . 학회지에 실릴 글이기 때문에 여러 형식적 "관행의 제약" 있었겠습니다만 , 어쨌든 생각에 이영훈, 박섭등 "닫힌 일반 논리와 적들 " 형의 논리를 알리는 효과와 더불어 형의 대중들- 학회의 있을 동조자들과 잠정적 아줌마 독자들로 이어질- 적극적으로 생산하려는 쥐불놓기 시도가 약하달까요. 그러니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청자의 입장에서 말해 보자면, 식민지 시기 정조식 장려와 막모관행의 충돌이 자체로서 그리고 현재적 이해의 지점에서 결정적인가라는 물음을 안고 빨려들어갈 지점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지요 . 아마도 그것은 제목이 지나치게 서술적인 탓도 얼마간 있는 같습니다. " 사이", "충돌" 지나치게 관계론적인 함의가 내포되어 있어서 저간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요즘말로 "낚시 " 힘든 같네요.


"과문"하고 글도 안읽은 상태에서 선무당 짓을 좀 해보자면,
"농속" 이라는 것은 농업() 관행의 다른 말인가요? 그리고 구체적 표현은 농업기술로 대표되는 것인가요 ?

느낌에 농업기술과 토양 (지리) 대한 관계를 중심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 형의 논지에서 핵심적인 같은데요 .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농민을 특정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농속" 지리 , 역사의 관계로 이해될 여지가 있는 같습니다.

농업기술이 농업기술 자체의 역사와 지리적(토양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관점을 시사하는데요 . 흔히 듣는 말로 , "땅은 거짓말을 안한다 "는데, 그럼 농업기술이 거짓말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농민이 농업기술을 이해하거나 활용한 것일 텐데 식민지 조선 농민은 토지에 대한 자기 지식을 자원화 있었다는 상황이 결국 막모 잔존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인가요?

그런데 정치적 입장에서 막모의 잔존이 식민지 농업기획 나아가 식민화의 실패의 증거로 말해지는 것인가요? **누나가 정리 글에서 보면 "완전히 식민화 시킬 없는" 이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식민주의가 식민지를 완전히 식민화 시킬 없는"이란 문구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습니다. "완전한 식민화" "내선일체" 갖은 것을 의미하는 것도 같은데 , "내선일체" 특수한 식민지 전략으로 이해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요 ?

그리고 이건 상상입니다만 , 제초기 보급 이야기로 보아 오히려 일본의 정조식 보급과 증산 계획 자체의 차질론도 있을 같은데요. 농민의 저항이라기 보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일본 보고서, 자료들은 대개 그런 관점에서 쓰여지지 않았을까도 싶고 하여 오히려 제초작업의 고단함과 번거로움이 (자료에서는 아닌것 같습니다만 ) 정조식을 수용하는데 저항감을 만들었던 것은 아닌가요? 

또 **누나가 정리한 글에 보면 농민의 " 실용적 합리성 "이라는 말이 나오던데요 . 저도 그에 대한 입장은 **누나랑 비슷합니다 . 말이 이상하지만 농민은 실용적일 있지만 합리성은 항상 외부적인 개입에 의한 정당화를 수반하는 아닌가요?  제가 우려하는 것은 어떤 합리적 개인 혹은 합목적적 경제활동에 대한 신화의 부활입니다. 생산의 비합리적 가능성-사실 항상 생산은 그렇습니다만 - 대한 사고폭이 닫히는 느낌이어서 말입니다 .

오랫만에 한글로 글을 썼더니 무지 힘드네요. 미국에서 영어로 글을 써서 글을 못쓰는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글을 원래 쓰는것이었네요.

**누나가 공유해주신 고맙습니다 . 어쨌든 덕에 저도 뭔가를 써야했고 쓰고자 했으니까요.

A형 나중에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 항상 그렇듯 여러 생각할 여지들을 제공해 주는 글이네요. 생각에 인류학회지 판본으로도 한번 재구성해보심도 괜찮을 같습니다 . 자유롭게 이론적 문제들을 제기해 수도 있을 같은데요. 이야기가 다릅니다만, 인도에서 Green Revolution 이라는 기획의 성패를 두고 현지 학자, 미국, 영국 학자 요즘 말도 많은 재프리 삭스등등해서 이래저래 논쟁들이 오가던데요. 이영훈류의 입장에서 보자면 산미증산계획같은 것이 그런 류의 식민지 기획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더군요 . 끝까지 사족입니다.


모두들
건강과 건투를 빕니다 .

P.S.

** 허걱, 막상 보낼려고 했더니 A형 장문의 답글을 이미 보내셨군요 .

그냥 개인 소장 하려다가 보냅니다.

제글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봐 주세요..A 답글도 아직 읽은 상태인데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굳이 글에 답글을 달지 않으셔도 됩니다 . **

** 잠깐 읽었는데요 . .. A형은 지리를 기후로 봤던 것이었군요. 글을 읽어봐야할까 봅니다. 저는 토양으로 이해했었습니다만….. 기후로 보는 것이 농속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관점일 있겠네요. 한데 근대 기상관측이 20 세기 초에 시작되니까 기후 차이에 대한 이해는 얼마간 보정될 있는 것도 아니었을까도 싶은데요 . 저는 자기땅은 자기가 안다 그런 농민과 농토와의 친밀도로 구성된 지식체계의 문제로 이해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