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28일 금요일

정신분석의 아버지, 150년을 살아 숨쉬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150년을 살아 숨쉬다
[해외리포트] 오스트리아,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 축제분위기
텍스트만보기   배을선(shemish) 기자   
▲ 1921년의 프로이트
현대 정신분석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올해는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고, 오는 5월 6일은 그의 탄생일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그의 1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들이 열릴 예정이다.

물론, 그를 기념하는 행사는 프로이트가 47년 동안 거주한 집이자 환자들을 치료한 곳인 비엔나 9구의 베어르그가세(Berggasse) 19번지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이곳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탈바꿈했으나 지금도 그가 환자들을 상담했던 상담실, 글을 쓰던 작업실, 진료를 기다리던 대기실 등은 가구들만 빼고 그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베어르그가세 19번지'와 그가 사용했던 유명한 정신상담용 소파 '카우치(Couch)'는 '심리분석'과 동의어로 불린다.

평생 인간의 정신세계를 연구하며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프로이트. 하지만 그도 삶의 희로애락에서 자유롭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특히 말년에는 지독한 병마에 시달렸다.

나치 피해 영국 망명... 누이 넷은 가스실에서 죽음

프로이트는 1856년 구 체코슬로바키아(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의 모라비아 프라이버그에서 태어났다. 4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주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특했던 프로이트를 위해 그의 부모는 없는 살림이지만 그가 책을 읽을 때마다 남포등을 켜주고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는 촛불을 켤 만큼 학업을 장려했다고 한다.

무의식과 성격 이론

프로이트는 마음을 빙산에 비유해 물 위에 떠있는 작은 부분이 '의식'이라면, 물 아래의 훨씬 더 큰 부분을 '무의식'으로 보았다.

그는 무의식이 생명에 대한 하층구조로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힘임을 강조하며 그것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프로이트는 40여 년에 걸쳐 '자유 연상'의 방법으로 무의식을 탐구했고, 이를 토대로 독특하고 포괄적인 '성격 이론'을 탄생시켰다.
비엔나국립의대를 졸업한 프로이트는 신경학, 꿈, 성, 죽음 등 인간의 정신세계에 관해 무수한 논문과 저서 등을 발표했다.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페티시즘, 유아의 성욕, 항문에로티시즘, 여성의 불감증 등 범상치 않은 이런 용어들을 입에 담은 대가로 프로이트는 젊은 시절 비엔나의학연구회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현대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결국 학회는 75세의 노장 프로이트를 명예회원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이 유태인 심리학자의 목숨도 위태로워졌다. 합병 3일 후인 3월 15일 나치는 평화롭던 베어르그가세 19번지로 쳐들어와 이 세계적인 석학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가족들이 소지한 현금과 여권을 빼앗아갔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쇄한 프로이트 박사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압박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프랑스의 여성심리학자 마리 보나파르트가 애쓴 결과 그는 딸 안나와 함께 3개월 후인 6월 15일 영국 도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비극적이었다. 보복으로 나치는 프로이트의 누이 넷을 모두 가스실로 보내 잔인하게 살해했다. 당시 누이들은 모두 칠십을 넘긴 고령이었다.

그리고 영국에 도착한 프로이트 앞에는 나치에 버금가는 치명적인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던 프로이트는 런던에서 한 차례 더 암수술을 받아야 했다. 생체조직 검사에서 악성종양을 발견한 의사들은 프로이트에게 수술이 불가능한 불치암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939년 9월 23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런던에서의 삶을 고통으로 보냈다.

골초 프로이트, 시가와 커피 없이는 못살아

▲ 프로이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프로이트가 피우던 시가.
ⓒ 배을선
1923년 처음 암 선고를 받았으니 프로이트는 죽기까지 무려 16년을 고통 받았다. 그에게 암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시가'였다.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살 정도로 골초였는데 특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프로이트 박물관에는 아직도 그가 즐겨 피우던 시가와 시가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평일에는 환자들을 상담하고 일요일에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적어나갔는데 이럴 때면 항상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온몸에 암세포가 퍼지면서 그는 두 가지를 단념해야 했는데 바로 담배 피는 것과 저술 활동이었다. 담배를 끊은 후 프로이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담배를 끊은 이후로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담배를 끊은 것보다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이 더 슬프다."

▲ 카페 코어브. 프로이트가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커피를 마시곤 했던 카페. 지금도 유명한 카페하우스 중의 한 곳으로 남아 있다.
ⓒ 배을선
또 그는 담배뿐만 아니라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발병 이후에는 커피도 삼가야 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보티브성당 앞의 공원을 거닐다 자신이 재직하던 비엔나국립대학교의 도서관으로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아마 프로이트는 속이 출출해지면 대학교 앞의 전통카페하우스 '카페 란트만'에서 커피 한 잔과 토르테 한 조각을 즐겼을 것이다.

비엔나 중심가에 있는 '카페 코어브'는 그의 단골 카페였다. 프로이트는 자주 이곳에 들러 홀로 커피를 마시거나 사색을 즐겼고, 동료 학자들과 비엔나심리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독한 시가와 쓴 커피를 입에 댈 수 없게 됐다. 그 괴로움이 컸던 탓일까. 프로이트는 마사 버네이즈에게 "외롭지만 않다면 건강한 게 최고"라고 말했다.

암의 고통,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살고 싶다

▲ 영국 런던의 과학박물관에 걸려 있는 프로이트 그림.
ⓒ 김성수
죽음을 학문적으로 연구했지만 프로이트도 죽음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 못하고 젊음을 부러워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친구에게 그는 "여든 살 된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는 대화거리가 못 되네"라며 "젊음이 최고"라고 말했다.

또 한 미국인 방문객에게는 "젊음에 가치가 없다는 것은 진실과 반대입니다. 젊음이야말로 유일한 가치죠. 늙은 게 뭐가 좋습니까? 특히 여자들은 늙으면 흉해지죠. 남자들도 다를 바 없지만!"이라고 농담을 했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죽을 시기를 예측하기도 했으나 맞지는 않았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이복형제 임마누엘이 81세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신도 81세에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도 81세를 넘기자 어머니가 사망한 95세에 자기도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81세도, 95세도 아닌 83세에 생을 마감했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프로이트는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런던에서 받은 세 번째 암 수술 이후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특히 턱뼈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는 이러한 통증, 혹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더욱 집필에 열중했다. 그는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기 위해 진통제를 거부하기도 해 가끔 의사와 다투기도 했다. 그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혼미한 정신보다는 맑은 정신을 갖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프로이트는 <모세라는 인물과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1938)를 탈고했고 <정신 분석 개론>(The Outline of Psychoanalysis)을 써나갔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조바니 코스티간은 "그가 고통 속에서 쓴 저서들에 진부함이나 지루함은 없다.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럽던 기간에 쓴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없다. 다만 젊음의 활기와 자신감이 넘쳐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고 밝혔다.

영원히 불멸로 남을 프로이트

▲ 베어그가세 19번지. 프로이트가 47년간 살았던 집이자 환자들을 치료했던 병원(?). 지금은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프로이트가 살았던 그대로를 전시하고 있다.
ⓒ 배을선
하지만 말기의 프로이트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암세포가 피부를 뚫고 나와 눈 주위까지 감염됐으며 세균에 감염된 피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갔다. 1939년 9월 21일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치의 슐 박사에게 말했다.

"자네 더 이상 살아갈 가망이 없을 때 나를 편안하게 가게 해주겠다던, 그 약속 잊지 않았지?" 결국 슐 박사는 두 차례에 걸쳐 프로이트에게 모르핀을 투약했고 그는 끔찍한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 잠과 같은 죽음을 맞았다.

고통 속에서도 프로이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고 인생을 그대로 직시했다. 그는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죽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추억 속에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불멸입니다."

정신분석의 안소니 스토는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이나 조언을 주는 것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소리에 오랜 시간 귀를 기울인 프로이트의 기술이야말로 현대적 형태의 대부분 정신치료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것은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고 말했다. 심리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딱딱한 심리학개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추억'과 '대화'를 통해 150년을 살고 있다. 이게 바로 그가 말한 단 하나의 불멸이 아닐까?
2006-04-28 11:42

2006년 4월 9일 일요일

국제 환경 협약 참고 자료

◆ 국제법.국제 관례는=정부의 대중국 황사 대책은 국경을 넘는 환경오염 행위에 대한 국제법 해석과 맞물려 있다. 1972년 채택된 스톡홀름 인간환경선언은 "모든 국가는… 자국의 환경이나 자국 관할권 외의 지역에 피해를 일으키지 않을 책임이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국제 관례는 다른 나라에 주의 의무를 통보할 책임이 있다는 해석을 따르고 있다. 피해를 일으킨 국가에 책임까지 지운 사례는 없다.

1930년대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트레일 제련소 사건'은 대표적 국가 간 환경오염 문제이나 제련소 측과 피해자 간 민사소송이라는 점에서 황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사건은 미국 접경 캐나다의 트레일 제련소가 미국 워싱턴주 사과농장에 아황산가스 피해를 일으키면서 농가가 미국 정부에 개입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양국 정부는 이에 따라 양국과 중립국 인사 3명으로 구성된 중재재판소에 이 사건을 회부했고, 재판소는 캐나다 측에 40만여 달러를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이 사건은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국가 책임의 원칙은 제시했지만 현재의 국제 관례상 이런 판결이 다시 나오기는 불가능하다는 분석들이다. (소병천 법학박사)

이에 따라 중국.몽고발 황사 해법도 유럽의 다자협력 접근 방식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79년 유럽 이외의 국가를 포함해 33개국이 서명한 '장거리 대기오염 물질 이동에 관한 협약'은 대표적 예다.


[중앙일보 2006-04-10 06:02]



2006년 4월 3일 월요일

Democratization of academic disciplines

갑자기 수업을 준비하다 생각이나서, 잊어먹기 전에 적어둔다.

지난 토요일 사회학과 이박사와 커피를 마시다 나눈 이야기 중에 UC Irvine 에서 왔다는 교수의 콜로퀴엄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다.

이박사의 전언에 따르면,

그 교수의 주된 논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Practical 한 학문의 영역은 오히려 대학내에서 그 자리가 축소되었던 반면, 근대 교육의 이상- 보편주의적 지식습득-에 부합하는 학문들은 그 실질적 조건으로서 학문시스템의 민주화와 더불어 계속 발전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00년도 초기에는 오히려 미국에서 구체적인 실용과학이 대학에서 가르쳐졌지만, 점차 그런 구체적 실용과학들은 대학에서 밀려나고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 전이되어 왔다는 것이다. 커리큘럼의 분석을 통해 그런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인문학의 쇠퇴는 그것이 일반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봉쇄됨으로써, 다시 말해 아주 특별한 재능있는 이들에게만이 학문적 성취의 길이 열린다는 점에서 근대적 교육의 일반적 정신에 위배되고, 학문의 민주주의 자체도 봉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분석인데, 혹시나 다음에 좀 더 생각을 해 볼 여유가 있을지 몰라서 기록해 둔다.

2006년 4월 2일 일요일

[베트남전문서 발췌] 참전 7개국 정상회담

[베트남전문서 발췌] 참전 7개국 정상회담

= 정상회담 날짜 변경과 관련해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한국의 사카린 사건을 언급한 대목이 있음 =

◇ 주미대사-레오나르 웅거(Leonard Unger) 미국 월남문제 담당 부차관보 문답( 66.7.9.주미대사 보고)

- 주미대사 = 하노이 하이풍 폭격에 대한 반응으로서 북한 괴뢰는 지원병 파병 운운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또한 왈쏘(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도 만일 북월맹이 원한다면 지원병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한 사실을 들어 문의.

- 웅거 차관보 = 북한 괴뢰의 지원병 파견운운은 하노이 하이풍 폭격에 대한 비난성명중의 일부로서 당장 파견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으나 과거에 비하여 일보 더 나간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왈쏘조약기구 국가들의 지원병 파견운운은 이들 국가들이 과거 개별적으로 말한 내용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며 새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관계기관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쏘련의 과거성명서를 다시 반영시킨 것이며 하노이 당국이 지원병 파견을 요구할려는 징조는 아직 보이지 않고 하노이 하이풍 폭격에 대한 신랄한 비난인 것에 불과하며, 다만 소련이 왈쏘기구 제국들로하여금 미국 비난성명서에 동의하도록 하였다는 것에 다소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한가지,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과거와 달리 이번 성명서에 동의하였다는 점 등이 다른 것이다.

- 주미대사 = 만일 공산제국들(중국, 북괴 및 동구라파 제국들)이 지원병을 파견하는 경우 과거 미국은 수차에 걸쳐 성역이 없다고 언명했는데 이런 경우 미국의 태도는 어떠할 것인가.

- 웅거 = 가상적인 것에 대해 언급할 수는 없지만 사태를 신중히 검토하고 어느 정도의 어떤 규모의 파병인가를 검토한 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세우게 될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기본입장이 있다.

첫째, 미국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모든 군사행동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고 절대로 필요한 군사행동 이외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

둘째, 만일 월남전쟁에 외부세력이 간섭하고 참전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어떤 국가도 미국의 반격으로부터 면할 수가 없다는 입장.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전쟁확대의 위험성이 없으며 만일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과 반격을 가하게 될 것이다.

- 주미대사 = 존슨대통령이 언명한 것처럼 북월맹당국이 응한다면 전쟁 축소를 위해 군대를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미국은 철수할 것인가.

- 웅거 = 월남인 자신들이 그들 자신의 일을 충분힐 돌볼 수가 있다면 그 당시의 월남사태에 감안하여 철군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경우 한국군도 그때의 사정에 따라 비율적으로 철수하게 될런지도 모르겠으나 월남정부 당국에서 한국군의 계속 주둔을 원하든가 또는 어떠한 국제적인 합의에 따라 전 외국군이 철수든가, 그중 일부철수든가가 결정될 시, 이에 따라서 처리될 것으로 생각한다.

- 주미대사 = 만일 미국군대가 철수하는 경우 군대 이외에 월남에 나가 있는 한국인 각종 기술자, 기타 계약고용인들은 계속 월남에 잔류하게 될 것인가.

- 웅거 = 한국인 기술자는 잔류할 수 있을 것이며 적어도 당분간 월남사람들은 외부원조를 필요로 하며, 미국으로서도 어떤 형식이든간에 월남부흥을 위해 돕게 될 것이므로 한국인 기술자들은 남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미국내에 월남전쟁에 대한 낙관론이 떠돌고 있지만 월남사태가 곧 해결될 것 같지는 않으며 북월맹당국내에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점고해가고 있지만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할 시기는 오지 않은 것 같다.

◇ 월남자유참전국정상회담(작성일 66.10.7)

1. 회의명칭 = 월남전 지원국가의 정상회담

2. 개최지 = 필리핀 마닐라

3. 참가국가 = 한, 미, 필, 태, 호주, 뉴질랜드, 월

4. 회의목적 = 월남참전의 목적과 이념의 확인, 월남전 성격규정(월남전은 월남 만의 아님.태평양지역에있어서의 국제분쟁임), 명예스러운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한 전쟁을 수행할 결의를 표명, 월남전에 참가하지 않은 자유국가에 대한 대월지원 촉구 및 호소, 참전국가의 월남문제 처리를 위한 발언권 확립. 특히 아시아인의 ‘이니셔티브’ 강조(제네바회의 당사자만에 의한 처리반대), 태평양지역 방위의 불가분성 강조.

5. 회의 과제

- 월남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협상조건 결정

가. 당사자

1) 1954년 제네바 협정당사국만의 월남협상 반대. 협상은 참전국이 중심이 돼야 함. 제네바 협정당사국의 참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님.

2) 베트콩은 그 자체가 당사자가 될 수 없음.

나. 협상조건

1) 월맹의 대 베트콩 군사지원 중지(I.C.C 기능 강화)

2) 남월남에 있어서 월남공화적 정부 이외의 정치권력을 인정치 않음(소위 해방전선의 해체)

다. 평화협상문제는 참전국의 공동협의를 통해서만 논의. (이하생략)

◇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방송 담화(66.10.8.주필리핀대사 보고)

- 회담이 당초 11월에서 10월말로 앞당겨진 이유와 관련,

- “이번 정상회담은 필리핀이 주창한 것이며, 처음에는 11월 하순경 개최할 생각이었으나 뉴질랜드와 호주의 선거관계로 앞당겨졌으며, 또한 10월초에 개최할 계획에 대해 어떤 나라가 자기국내 문제 때문에 곤란하다는 사정(사카린 밀수 문제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음)을 표시하였기 때문에 10월 24∼25일로 결정된 것이다.

(주석 =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의 첫 보도로 세상에 드러남)

◇ 주미대사의 번디 극동담당차관보 면담 보고(66.10.8)

- 존슨대통령의 방한시 토의할 의제와 관련,

번디씨는 첫째 마닐라 회담결과에 대한 재검토, 둘째 양국간의 공통된 문제 특히 양 대통령이 아세아문제를 어떻게 관찰하고 있는가에 문제, 셋째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박 대통령의 설명을 존슨 대통령이 듣기를 원하고 있고, 넷째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통일문제에 관해 매우 관심이 있으며 협의하기를 원하고 있고, 다섯째 일반환담에 들어가서는 한국의 국내정치 정세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싶다고 말함. 번디씨는 지난 번 존슨 대통령의 대구라파 및 동서양 진영 긴장완화 연설에서 지적한 독일 통일문제와 한국의 통일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부언하였음.

번디씨는 또한 유엔에서 미국은 종전과 같이 한국의 입장을 강력히 지지하여 줄 것이라고 재차 다짐했음.

◇ 7개국 회담에 대한 한국입장(66.10.17. 외무부 발, 주미대사 수신)

- 아국의 견해

의제의 명칭은 회의 성격을 표시하는 것이며 회의 진행의 방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의제를 토의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회의가 무엇 때문에 개최되느냐에 관한 점이 분명히 돼야 할 것임. 정부의 견해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는 참전국들이 어떻게 하면 월남전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느냐(군사적 승리)에 관하여 토의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와는 반대로 전쟁에 지쳐서 이제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평화를 희구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될 것임. 오히려 월남에서의 침략이 종식되기까지 절대로 군사적으로 후퇴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결의를 확고히 표명할 필요가 있고, 그럼으로써 적에게 약점을 노출하기는 커녕 정신적인 압력을 가해야 할 것임. 그렇지 않고서는이 회의의 의의는 별로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음.

이상과 같은 회의에 임하는 정부의 태도에 비추어 정부는 비(필리핀)측의 원래의 가의제가 마치 회의를 평화모색 회의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불만히 생각하고 평화적 해결에 관한 3개의 의제를 간단히 1개항으로 간추리도록 주비대사에게 훈령한 바 있음. 또한 군사적인 정세의 검토 및 전쟁 노력의 강화 방안을 반드시 의제에 포함시키도록 훈령한 바도 있음.

- 가의제 제1항 Review of the military situation and progress of resistance to aggression and subversion in Vietam 이라는 표현은 아직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그 표현이 월남군사정세의 종합적인 검토와 침략과 파괴활동을 분쇄하는 군사적인 공동노력방안을 모색하고 장차에 있을 어떠한 사태의 변동에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논의될 수 있는 의제가 설정돼야 할 것임.

- 가의제 제5항 월남전의 평화적인 해결이라는 의제에 A, B, C 세가지는 설사 그런 것을 토의하는 일이 있을 망정 세부의제로서는 삭제하는 것이 좋을 것임.

이상과 같은 고려에서 정부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의제안을 비측에 제기하였음.

(의제안)

1) 월남의 군사 정세의 검토 및 대책

2) 월남의 복구와 안정

가) 정치 나) 경제 다) 제 과업

3) 월남 사태의 평화적 해결 방안

4) 지역적 방위와 공동 협조

이상과 같이 정부는 월남사태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의 토의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것만을 위해 이 회의가 소집됐다는 식의 해석에는 반대하고 있는 것임. 이와 같은 뜻에서 주최국이 제시한 회의의 가명칭 Manila summit peace conference 에서 peace를 삭제토록 훈령한 것도 이러한 취지에서 였음. (이하 생략)

◇ 월남지원국정상회담 문제점과 우리의 견해(66.10.18.외교부 보고서)

- 한국은 현재 이상 월남에 군대를 증파할 수 있는가.

= 아직 증파에 관한 월남공화국으로부터의 요청도 없지만 설사 요청이 있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증파는 아국의 국방상 곤란함.

파월병력 4만5천명은 우리나라 총인구 2천800만명의 622분의 1에 해당되는 바 미국의 비율과 동일함. 미국은 총인구 1억9천300만명의 622분의 1에 해당하는 31만명을 참전시키고 있음.

◇ 주미대사 보고(66.10.19)

주미대사는 번디 국무차관보를 방문하고 마닐라 정상회담 및 존슨 대통령 방한문제에 대해 대담한 결과,

마닐라 정상회담에 있어서 전쟁수행의 결의 표명과 평화적 해결방안의 두 가지 사항은 같은 비중으로 취급돼야 하며 결코 후자에 치중하지 않는 미국측 태도를 확인.

입력 : 2005.08.26 11:16 56'
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508/2005082601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