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9일 수요일

Sadistic ? Too vulnerable.

왜 그럴까? 왜 그럴까? .... 이런 질문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어떤 일반적 추상이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레베카의 마지막 수업에서 기말 페이퍼에 관한 그룹 워크샵을 하는데, 내 코멘트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로리엔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코멘트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줄로만 알았는데, 조금 지나니까 그 이상이다.

결국 자기글이 말이 안된다는 것 아니냐고, 너네들이 괜찮다고 했던 것-미국에서는 다들 처음에 부드럽게니까-은 거짓말 아니었냐며 서럽게 울어버린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내가 큰 잘 못을 한 것 같은 상황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로시오와 아리엔이 수습에 나섰고, 로리엔은 얼마 후 안정을 되찾았으나, 나의 황당함은 여전히 남게 되었다.

전에도 한번 썼지만, 내 영어가 짧아 전후좌우 다 짜르고 요점만 간단히-이마저도 버벅거리지만-하다 보니 내 말투가 대단히 위협적으로 들리는 것은 나도 이해를 하겠다.
말도 못 하는게 자기 글에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하니 더 비참해 질 수도 있겠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한국의 대학원에 유학 온 동남아 학생이 문법에도 잘 안맞는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네글은 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한국의 대학원생들이 진지하게 그 코멘트를 받아 들일지는 뻔하다고 볼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도발을 한 것일 테다. 그래도 어쩔 것이냐, 천성이 그런데. 내가 무슨 봉건 왕조체제, 식민지 체제에서 공출 당해 온 사람도 아니고, 말은 못 해도 몸이라도 써주고 얼굴 근육이라도 움직여가면서 느낌을 전달해 주는 것이 그래도 일정하게는 동료의식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가끔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가 이른바 북아메리카 여인네들을 "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8년에 캐나다에 있을 때, 학원의 여선생이 너무나도 정신이 없어보여서 수업시간에 좀 문제를 제기했더니-내 딴에는 다른 애들을 대변했다고 생각했는데-그 여선생 갑자기 강의실을 뛰쳐나가 학원 화장실에서 건물이 무너져라고 소리를 지르면 꺼이꺼이 울어댔다. 그때의 민망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과 동기로 부터 위협적이란 소리를 들었고, 오늘은 또 한 여자가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내말 다음에 어쨌든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쓰면 무슨 내가 새디스트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난 별로 그런 SM 플레이 관심없다.

어쨌든 이 북미의 여인네들과 나의 묘한 관계는 내 입장에서 보면 그녀들의 비정상적 자기방어 감각과 내 어이없는 영어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나는 더더군다나 미국식 립서비스, 사기진작 (Encouraging 을 뭐라고 해야하지?) 방식의 비판과 코멘트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항감조차 가지고 있다.

아닌 것을 아니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정상적 소통관계는 사실 서로를 좀 먹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백배 양보해서 그러한 미국식 배려와 칭찬, 그리고 북 돋아주기는 개인에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하는 에티켓으로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은 인신공격은 아니지 않는가? 무지는 비웃어도 사람은 비웃지 않는 것이 내 입장인데 좀 처럼 그러한 구분선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자리는 없나 보다.

네 글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 이러한 이론들을 한번쯤 고려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게 도대체 무슨 삶의 "낭심"을 걷어찬 반칙을 한 것이라고 그러는 것일까?

환장할 저녁이다.  

** "그녀들"이라고 범주화 시킨 것이 부당하고 골속에 박힌 섹시스트적 발상이겠지만,
    뭐 또 "탈마초"적 "건강함"이 여기서 문제이진 않은 것 같다. 

2006년 11월 27일 월요일

전세계인을 맘 껏 벗기는 Spencer Tunick

가장 많은 사람을 벗게 만든 사람을 뽑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박정희, 전두환 계열의 잔혹한 독재자도 아니요 "작업의 천재" 카사노바 계열도 아닌,
바로 이 사람,
끊임없이 해외토픽란을 장식하는,
미국의 사진작가 Spencer Tunick 이 아닐까 싶다.



해외토픽에서 간간히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이 사람의 실체와 작업을 직접 보게 된 것은,
며칠전 새벽 무심코 켠 텔레비젼에서 그의 작업에 대한 다큐멘터리 Naked Body 를 보면서였다.

"오~ Naked"
누가 쉽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눈을 감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거나 두손을 모으고 생부아닌 그들만의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코메디가 적성에 맞지 않는 이상,
어느새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몰입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오 호~"


그러나 HBO의 삼부작 다큐멘터리의 하나인 이 필름은,
Spencer Tunick의 단순한 전세계 "누드 출사" 기록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

"예술"의 세계는 항상 "포르노"의 현실과 거리를 꼭 이렇게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불편한 논리이지만, 설득의 논리는 필요하므로, 많은 에로영화 감독들도 그래왔듯 그도 최소한의 논리적 항변은 필요했을 것이다. 고발과 고소도 만만치 않고 그것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Sexy"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라, "Artistic"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강변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을 스스로 "아담과 이브"라고 믿게 하는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벗기기 성공스토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뭔가 다른게 있었다. 육체에 대한 그 나름의 철학.
De Certo의 논지를 연상케 하는 그의 철학은 고정되고 확실한 것으로 자리하는 경관에 대한 육체의 개입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역사적이고, 상징적이며 하여 육체를 왜소하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건물, 성상, 거리등등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억압에 대한 육체적 저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에 대한 긍정,
볼품없어 하는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긍정성의 복원이 그의 기획에 핵심 모티브였다.

그러나 아마도 모든 누드 작가들에게 이런 논리들은 이미 교리일지도 모른다.

내 느낌엔 적어도 그는 철학자이기엔 카메라 뷰파인더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먹고사는 문제와 젊은 작가로서의 명성에 대한 집착같은 것도 그를 "교리 공부" 우등생에 머무르게 했는지도 모를일이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이 상파올로 비엔날레에 초청 받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런 심증을 강화시켰다.

어찌되었든 얼떨결에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지루해"하지 않고 보게 된 것은, 구 소련에서 그가 진행 한 작업에 대한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좌파 멜랑꼴리아"를 자극했달까?




다른 지역에서의 자발적 지원자들과는 달리 구소련에서 그는 상당수 모델을 직접 설득 해야만 했다.

그 중 박물관에서 일하는 한 여성의 의문과 주장들은 역사적, 사회적 몸에 대한 의제들과 맞닿아 있었다.

그녀는 이를 테면,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성적인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당신이 찍은 사진을 본 사람들(러시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발가 벗은 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성적 의미를 생산한다."

벗은 사람과 벗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육체들이 나뉘는 것은 새로운 구획의 생산이다.
심지어는 죽은자들에게 조차 수의를 입히는 세상에서,
단지 삶의 생성의 자리에서만이 누드는 허용되어 있을 뿐이다.
하여 비생산적인 나체는 그 자체로 끊임없이 비윤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지거나 그 자체가 "상품"이 되는 한에서만 용인된다. 그 조차도 "더러운" 상품으로 종종 치부되어지지만.

사실상 누드 모델들은 대개 이미 "자신만만" 몸뚱이들이다. 적어도 그래야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
조각같은 육체. S라인과 8등신의 몸뚱이만이 벗을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통사람의 누드라는 Spencer 의 기획은 "몸 정치학"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구소련체제에서 "국가의 몸"으로써 자신의 몸을 인식하는데 익숙했던 한 남성의 누드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자아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실천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서야 내 자신의 몸을 되찾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들이 그 모든 의미를 생산하기엔 또 한계가 있지 않나도 싶었다.
그의 "작업"은 몸뚱이들을 다시 재배치하는 작업이므로, 주체들이 스스로 원하는 곳에서의 벌거벗기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배경"에서의 벌거벗기 임으로 "작품"의 형식 속에서의 소외는 문제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 활동 기저에는 이미 공공노출의 지난한 역사가 놓여져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미국식 전통의 센세이셔널리즘라 치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정 "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다면, 몸의 "대상화"를 해체하는 창조적 실험정신이 필요할 것이었다.
"몸"은 이미 충분히 "도구"적이니까..

사족하나, 다큐멘터리를 쭉 보면서 느낀 것인데, 왜 작가인 그는 옷을 벗지 않는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더라.
"발기"를 걱정해서인가? 모델들과 작가의 차이를 생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발랄한 사진작가라는 혐의를 떨쳐버리지 못할 구석이 곳곳에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2006년 11월 25일 토요일

편지 하나

** 누나 읽어 보았습니다.

저, 메일 받았는데요 . 반송이 되었었나요?
B 형은 같이 살고는 있으나 , 제가 별로 아는게 없으니 직접 소식을 들으시는게 누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같네요.  ^^

사실 첫번째 메일을 받고 몇자 끄적끄적 했었는데요 . 수업시간 전이라서 마무리도 못했고 입장이랄까 이런것도 애매하고 해서 어딘지 모르지만 드래프트박스에 들어가버렸던 같습니다. 추수감사절이라 도서관도 문을 걸어 잠그고 저도 별로 "" 하고 싶지 않으므로 느낌들을 풀어 놓아 볼까 합니다. (솔직히 좀 어설프게 마신 술기운이기도 합니다. 초롱초롱해져서..ㅎㅎ)

첫번째 메일을 받고 제가 쓰던 메일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 결정" 이다라는 였던 같습니다. " "이라는 앞에 "차라리" 혹은 "결국은 " 자리다툼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둘다 차이를 만들지는 못하겠더군요.


세미나
계획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이긴 한데요 .
굳이 제  관심의 단편을 꺼내보인다면 , 같은 경우에는 Properties 자체에 보다 관심이 몰려 있는데 , 기본적으로 소유물이라는 사물의 특정 형식이 사물과 권리의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구요. 중첩되는 권리 효과 ( 심지어는 사물 자체의 존재적 조건으로서의 권리) 비밀은 독특한 존재적 형식에 끊임없이 기입된다는 가정때문입니다. 권리 행사의 매개였다가 권리보증의 기표였다가 권리 충돌의 장이기도 하니까요 . 보다 직접적으로 저는 상품의 형식으로써 소유물에 접근해보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교환가능성 , 다시말해 최소한의 가치생성의 가능성을 전제로 해서만이 소유감각 내부로 사물의 정렬이 이루어질 것이다는 가정때문입니다. 환경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아닐까 싶습니다만.


다른
관심은 하나는 " "라는 관념 혹은 감각에 대한 것인데요 . 그것이 사회적으로 "잉여 "라는 일시적 우연적 상태와 " 과잉"이라는 지속적 욕망의 순환이 교차하는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삶과 세계에 대한 윤리적 담론들 또한 스며들기도하구요. 그러니까 "가진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 " 부터 "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까지 자체를 대상적(소유물을 통해) 으로 구축하는 어떤 논리들에 대한 관심이지요. 부의 규준이   소유물의 총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딜레마에 대한 관심이기도 합니다. 저도 개념적으로 최근 수업들과 몇몇 최근 맑스주의 독본들을 통해서 새로 관심을 갖게된 것이라 더이상 설명하는 것은 감당이 안될 같네요.

지난 여름에 베트남에 있을 포드재단이 후원한 "배급경제의 시대" 라는 전시회에 갔었는데요. 맑스가 제창한 사적소유의 철폐를 집단적소유로의 대체로 밖에 이해하지 했던 제한적 상상력의 역사는 결국 삶이 항상 위대하다라는 눈물나는 휴머니즘의 반복이더군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시기를 힘들고 암울하게 묘사하고 현재의 이른바 " 시장경제체제" 긍정하면서도, 내러티브 내부에 이질적으로 스며있는 "공유" 대한 향수 그리고 그것을 통한 현실부정이었지요. "그래도 그때는 내것 니것이 없었다" 라던지 "가진자 없는자라고 해서 지금 처럼 나뉘지 않았다"같은 이야기들 속에 말이지요 . 그런 향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물론 현재의 삶에 뿌려 향기나는 향수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신경증이 도지던데요 .사실 베트남의 경우에 배급경제 내부에 50 여개의 배급 차등 등급이 있었고 , 하여 부의 차등이 오히려 철저하게 구조적으로 행해졌던 것이었으니, 그때는 내것 니것이 없었다같은 말은 그들이 테레사 수녀였다가 지금은 집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그고도 밤잠을 설치는 아줌마가 되었다고 자성하는 것이 아닌이상, 사실 별로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성찰성의 외재 화랄까. 오히려 " 동란 " 기억하는 한국의 내러티브들과 겹쳐놓고 보면 삶의 비정상성( 현실에 파악되는 ) 대한 일시성과 찰라성에 대한 도덕적 자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벤야민이 언급한 "좌파 멜랑꼴리아" 동종이상에 다름 아닌 같구요. 결국은 어떤 수준에서 사회주의 배급경제는 소유감각을 흐트러 놓는데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얼마간 성공했으나 새로운 소유감각 혹은 반소유감각을 생성하는데는 실패했고 , 어미를 뺏어가면 근친상간은 안일어 것이라는 류(국유화)의 정치적 실험을 상당히 진지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셈이죠.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A형
글에 대한 **누나의 자세한 논평 보았습니다 .

제가 틀리지 않다면, 지난번 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연장선상에 있는 같네요.

제가 기억하기엔 술자리에서 A형이 이글을 특수한 목적-한국역사연구회 였나보군요- 위해 글이라고 했던 같습니다 .

제가 글을 읽기는 힘들 갈구요. 물론 노력하면 안될 것이야 없습니다만, **누나가 자세한 발제겸 평을 해주신데다가, 안타깝지만 제가 범접하기 녹녹치 않을 같기 때문에 지금은 제가 전에 발표문과 발표를 보고 느꼈던 점들만 간략히 덧붙이고자 합니다.

**누나완 다르게 저는 사실 A형이 충분히 아줌마들 사이에서 명사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는데요. 튼실한 허벅지 때문이 아니라, 순진하게 들리겠지만 요즘 주말 농장도 가고 아이들 데리고 생활사 박물관 민속박물관가는 교육받은 전업주부들도 (아줌마가 그런 뜻이라면 ) 많으니까 말이지요. 사실 A 글은 형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식민지 조선식 막모관행 " 행하고, 보고 싶은 현재적 욕망에 아주 폭넓게 열려있는 것도 같습니다 . 정조식과 막모가 뭔지도 모르는 저같은 사람의 지적 빈곤의 유희도 있으니까요. 사족이지만, 네이버에서 정조식을 치면 제법 자세한 하지만 알다가도 모를 설명이 나옵니다. 한데 막모를 치면 북한어로 "허튼 " 라고 간략히 나오더군요. 북조선에서 조선식 농속의 하나인 막모를 " 허튼" 모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자가 다를지도 모르겠군요.(한자가 같다면 참으로 재밌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여간 그것을 보고 나니 뭔가 이해의 고리가 꼬여버렸네요.
다시 돌아가서 , 재미나 관심의 문제가 소재나 주제적으로 A 글에 없는 것은 아니지요 . 그런데 뭔가 독자들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면 아무래도 **누나가 지적한 부분들이 타당할 합니다 . 학회지에 실릴 글이기 때문에 여러 형식적 "관행의 제약" 있었겠습니다만 , 어쨌든 생각에 이영훈, 박섭등 "닫힌 일반 논리와 적들 " 형의 논리를 알리는 효과와 더불어 형의 대중들- 학회의 있을 동조자들과 잠정적 아줌마 독자들로 이어질- 적극적으로 생산하려는 쥐불놓기 시도가 약하달까요. 그러니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청자의 입장에서 말해 보자면, 식민지 시기 정조식 장려와 막모관행의 충돌이 자체로서 그리고 현재적 이해의 지점에서 결정적인가라는 물음을 안고 빨려들어갈 지점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지요 . 아마도 그것은 제목이 지나치게 서술적인 탓도 얼마간 있는 같습니다. " 사이", "충돌" 지나치게 관계론적인 함의가 내포되어 있어서 저간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요즘말로 "낚시 " 힘든 같네요.


"과문"하고 글도 안읽은 상태에서 선무당 짓을 좀 해보자면,
"농속" 이라는 것은 농업() 관행의 다른 말인가요? 그리고 구체적 표현은 농업기술로 대표되는 것인가요 ?

느낌에 농업기술과 토양 (지리) 대한 관계를 중심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 형의 논지에서 핵심적인 같은데요 .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농민을 특정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농속" 지리 , 역사의 관계로 이해될 여지가 있는 같습니다.

농업기술이 농업기술 자체의 역사와 지리적(토양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관점을 시사하는데요 . 흔히 듣는 말로 , "땅은 거짓말을 안한다 "는데, 그럼 농업기술이 거짓말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농민이 농업기술을 이해하거나 활용한 것일 텐데 식민지 조선 농민은 토지에 대한 자기 지식을 자원화 있었다는 상황이 결국 막모 잔존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인가요?

그런데 정치적 입장에서 막모의 잔존이 식민지 농업기획 나아가 식민화의 실패의 증거로 말해지는 것인가요? **누나가 정리 글에서 보면 "완전히 식민화 시킬 없는" 이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식민주의가 식민지를 완전히 식민화 시킬 없는"이란 문구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습니다. "완전한 식민화" "내선일체" 갖은 것을 의미하는 것도 같은데 , "내선일체" 특수한 식민지 전략으로 이해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요 ?

그리고 이건 상상입니다만 , 제초기 보급 이야기로 보아 오히려 일본의 정조식 보급과 증산 계획 자체의 차질론도 있을 같은데요. 농민의 저항이라기 보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일본 보고서, 자료들은 대개 그런 관점에서 쓰여지지 않았을까도 싶고 하여 오히려 제초작업의 고단함과 번거로움이 (자료에서는 아닌것 같습니다만 ) 정조식을 수용하는데 저항감을 만들었던 것은 아닌가요? 

또 **누나가 정리한 글에 보면 농민의 " 실용적 합리성 "이라는 말이 나오던데요 . 저도 그에 대한 입장은 **누나랑 비슷합니다 . 말이 이상하지만 농민은 실용적일 있지만 합리성은 항상 외부적인 개입에 의한 정당화를 수반하는 아닌가요?  제가 우려하는 것은 어떤 합리적 개인 혹은 합목적적 경제활동에 대한 신화의 부활입니다. 생산의 비합리적 가능성-사실 항상 생산은 그렇습니다만 - 대한 사고폭이 닫히는 느낌이어서 말입니다 .

오랫만에 한글로 글을 썼더니 무지 힘드네요. 미국에서 영어로 글을 써서 글을 못쓰는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글을 원래 쓰는것이었네요.

**누나가 공유해주신 고맙습니다 . 어쨌든 덕에 저도 뭔가를 써야했고 쓰고자 했으니까요.

A형 나중에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 항상 그렇듯 여러 생각할 여지들을 제공해 주는 글이네요. 생각에 인류학회지 판본으로도 한번 재구성해보심도 괜찮을 같습니다 . 자유롭게 이론적 문제들을 제기해 수도 있을 같은데요. 이야기가 다릅니다만, 인도에서 Green Revolution 이라는 기획의 성패를 두고 현지 학자, 미국, 영국 학자 요즘 말도 많은 재프리 삭스등등해서 이래저래 논쟁들이 오가던데요. 이영훈류의 입장에서 보자면 산미증산계획같은 것이 그런 류의 식민지 기획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더군요 . 끝까지 사족입니다.


모두들
건강과 건투를 빕니다 .

P.S.

** 허걱, 막상 보낼려고 했더니 A형 장문의 답글을 이미 보내셨군요 .

그냥 개인 소장 하려다가 보냅니다.

제글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봐 주세요..A 답글도 아직 읽은 상태인데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굳이 글에 답글을 달지 않으셔도 됩니다 . **

** 잠깐 읽었는데요 . .. A형은 지리를 기후로 봤던 것이었군요. 글을 읽어봐야할까 봅니다. 저는 토양으로 이해했었습니다만….. 기후로 보는 것이 농속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관점일 있겠네요. 한데 근대 기상관측이 20 세기 초에 시작되니까 기후 차이에 대한 이해는 얼마간 보정될 있는 것도 아니었을까도 싶은데요 . 저는 자기땅은 자기가 안다 그런 농민과 농토와의 친밀도로 구성된 지식체계의 문제로 이해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