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7일 월요일

전세계인을 맘 껏 벗기는 Spencer Tunick

가장 많은 사람을 벗게 만든 사람을 뽑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박정희, 전두환 계열의 잔혹한 독재자도 아니요 "작업의 천재" 카사노바 계열도 아닌,
바로 이 사람,
끊임없이 해외토픽란을 장식하는,
미국의 사진작가 Spencer Tunick 이 아닐까 싶다.



해외토픽에서 간간히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이 사람의 실체와 작업을 직접 보게 된 것은,
며칠전 새벽 무심코 켠 텔레비젼에서 그의 작업에 대한 다큐멘터리 Naked Body 를 보면서였다.

"오~ Naked"
누가 쉽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눈을 감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거나 두손을 모으고 생부아닌 그들만의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코메디가 적성에 맞지 않는 이상,
어느새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몰입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오 호~"


그러나 HBO의 삼부작 다큐멘터리의 하나인 이 필름은,
Spencer Tunick의 단순한 전세계 "누드 출사" 기록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

"예술"의 세계는 항상 "포르노"의 현실과 거리를 꼭 이렇게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불편한 논리이지만, 설득의 논리는 필요하므로, 많은 에로영화 감독들도 그래왔듯 그도 최소한의 논리적 항변은 필요했을 것이다. 고발과 고소도 만만치 않고 그것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Sexy"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라, "Artistic"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강변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을 스스로 "아담과 이브"라고 믿게 하는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벗기기 성공스토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뭔가 다른게 있었다. 육체에 대한 그 나름의 철학.
De Certo의 논지를 연상케 하는 그의 철학은 고정되고 확실한 것으로 자리하는 경관에 대한 육체의 개입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역사적이고, 상징적이며 하여 육체를 왜소하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건물, 성상, 거리등등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억압에 대한 육체적 저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에 대한 긍정,
볼품없어 하는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긍정성의 복원이 그의 기획에 핵심 모티브였다.

그러나 아마도 모든 누드 작가들에게 이런 논리들은 이미 교리일지도 모른다.

내 느낌엔 적어도 그는 철학자이기엔 카메라 뷰파인더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먹고사는 문제와 젊은 작가로서의 명성에 대한 집착같은 것도 그를 "교리 공부" 우등생에 머무르게 했는지도 모를일이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이 상파올로 비엔날레에 초청 받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런 심증을 강화시켰다.

어찌되었든 얼떨결에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지루해"하지 않고 보게 된 것은, 구 소련에서 그가 진행 한 작업에 대한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좌파 멜랑꼴리아"를 자극했달까?




다른 지역에서의 자발적 지원자들과는 달리 구소련에서 그는 상당수 모델을 직접 설득 해야만 했다.

그 중 박물관에서 일하는 한 여성의 의문과 주장들은 역사적, 사회적 몸에 대한 의제들과 맞닿아 있었다.

그녀는 이를 테면,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성적인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당신이 찍은 사진을 본 사람들(러시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발가 벗은 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성적 의미를 생산한다."

벗은 사람과 벗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육체들이 나뉘는 것은 새로운 구획의 생산이다.
심지어는 죽은자들에게 조차 수의를 입히는 세상에서,
단지 삶의 생성의 자리에서만이 누드는 허용되어 있을 뿐이다.
하여 비생산적인 나체는 그 자체로 끊임없이 비윤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지거나 그 자체가 "상품"이 되는 한에서만 용인된다. 그 조차도 "더러운" 상품으로 종종 치부되어지지만.

사실상 누드 모델들은 대개 이미 "자신만만" 몸뚱이들이다. 적어도 그래야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
조각같은 육체. S라인과 8등신의 몸뚱이만이 벗을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통사람의 누드라는 Spencer 의 기획은 "몸 정치학"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구소련체제에서 "국가의 몸"으로써 자신의 몸을 인식하는데 익숙했던 한 남성의 누드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자아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실천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서야 내 자신의 몸을 되찾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들이 그 모든 의미를 생산하기엔 또 한계가 있지 않나도 싶었다.
그의 "작업"은 몸뚱이들을 다시 재배치하는 작업이므로, 주체들이 스스로 원하는 곳에서의 벌거벗기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배경"에서의 벌거벗기 임으로 "작품"의 형식 속에서의 소외는 문제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 활동 기저에는 이미 공공노출의 지난한 역사가 놓여져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미국식 전통의 센세이셔널리즘라 치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정 "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다면, 몸의 "대상화"를 해체하는 창조적 실험정신이 필요할 것이었다.
"몸"은 이미 충분히 "도구"적이니까..

사족하나, 다큐멘터리를 쭉 보면서 느낀 것인데, 왜 작가인 그는 옷을 벗지 않는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더라.
"발기"를 걱정해서인가? 모델들과 작가의 차이를 생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발랄한 사진작가라는 혐의를 떨쳐버리지 못할 구석이 곳곳에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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