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27일 화요일

채점 압박

학생들 과제 채점의 시기가 돌아오면, 채점자로써 권위를 느껴볼 겨를도 없이 두통과 불안에 떨게된다.

내 숙제 준비도 바쁜 터에 학생들 영어 문장들을 읽고 있기도 참 벅차고, 또 학생들 과제물의 대상이 되는 책들과 논문들을 뒤지고 있자면 고작 20명 남짓 채점하는데 하루 이틀이 꼬박 걸린다.

학생으로서는 매우 부러운 시스템이고 또 바람직 한 모델이지만, 학생들의 과제에 일일이 코멘트를 적어서 결국 나의 채점 기준을 다시 학생들로 부터 검사 받아야 한다는 것은 채점자로서는 매우 골치 아픈일이다.

그래도 돌이켜 한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나는 내 과제물을 선생님들이 읽기나 하는 지에 대해서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미국에서 가르치다 돌아온 한 여교수를 제외하곤 내 보고서들에 코멘트를 달아 돌려준 교수가 있었을까 싶다. 그래도 석사 논문을 쓸때는 제법 격식있는 코멘트를 받기도 했었지만. 

하여 나는 내 글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부분이 남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해 상호적으로 검증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 기회의 부재가 오늘날 나의 글쓰기를 상당히 압박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명분상, 학생들과 과제물을 두고 소통하는 이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것은 없다.

다만 이것이 "학점"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적일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채점"의 권위를 부여받은 내가 채점당하는 학생들로 부터 도전 받지 않기 위해서 몇줄 안되는 코멘트의 문법을 두번 세번 확인하고, 학생들의 학점이 정당한지 네번 다섯번 고려해야하고 그나마도 결국 학생들의 불만과 협상에 종종 빠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런 식으로 아주 좋은 소통 방식일 수 있었던 것이, "학점"과 "채점"의 압박에 놓이면서 가르치는자와 배우는자의 호혜적 가능성은 빛을 바래지는 듯 하다.




2007년 2월 26일 월요일

미국 사립대학 수업료: Duke University

신문에 등록금 인상에 관한 기사가 났다. 학부생을 기준으로 내년에 4.5% 인상예정이란다.
기사에 따르면,  동급 대학들에 비해서는 낮은 인상률이란다. 그러면서 올해 Princeton 은 수업료를 동결하기로 했다는 대비를 왜 하나 했더니, 프린스턴의 수업료 인상 동결도 지난 40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는 보도다.
결국 등록금 인상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이고, 듀크는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라는 것이고, 이런 논리로 대학 수업료는 전세계 대부분에서 하늘을 높은 줄 모르고 상승 중이다. 누가 총대를 메냐 마냐 서로 눈치보면서 말이다.   

기사에 따르면, 듀크는 최근 몇해동안 대체로 매년 4.5%씩 등록금 인상을 해 왔는데, 2005-2006년(헉!)에는 5.5% 인상했었단다. 등록금 인상안 발표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 학생들을 안심시키는 뉴스는 Bill & Melinda Foundation 에서 천만불을 지난주에 기부했고 (Melinda Gate 는 듀크 졸업생이고 등록금 인상등을 결정하는 듀크 이사회의 멤버였다) 그 돈을 등록금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학이 최소한 차선책을 마련해 놓았다는 선전은 되는 셈이다. 물론 그나마도 외국 학생들에겐 그림의 떡이 되고 말겠지만 말이다.

올해 (2007) 가을 입학생 부터 적용될 수업료 (다른 기타 부대 비용을 제외한 순수 수업료)는,

Trinity/Pratt : $34,335    4.5%인상
(트리니티는 인문계 학부생/ 프랏은 이공계 학부생이라고 보면 될 듯)

Nursing School : $32,400   14.6% 인상
(간호대학- 최근에 생겼고 미국 영주권 얻기 쉽다고해서 아시아계가 특히 관심 많은 학교. 우리나라에서 최근 간호사에게 일정한 초기 진단과 진료권을 보장하는 법을 보건복지부에서 만들었다가 의사가 수술칼로 배를 째는 신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중은 제 머리를 못 깍는 다는데, 의사는 제 배를 짼다.)

Medical School: $38,982     5.7% 인상
(한국 처럼 두배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군. 소득도 그런가?)

Nicholas School (환경대학(원)): $26,600   4.3% 인상

Law School: $39.960   4.5% 인상

Graduate School: $34,140   4.5% 인상
(석사과정생들에겐 큰 타격일 듯. 내년 Stipend 인상폭은 얼마나 될려나?)

Fugua School (MBA): $41,670   5.9% 인상
(역시 MBA ! 일년에 억 이상 들어간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Divinity School (종교대학(원)): $15,860   6% 인상  
(저렴한 학비에 감동. 목사들 수입은 얼마나 되나?)


내가 듣기로 DUKE 의 수업료는 미국의 사립학교들 대부분과 큰 차이가 없다. 주립대의 경우는 각 주마다 다르지만, 학부생 기준으로 $10,000 에서 $30,000 사이로 알고 있다.
언젠가 신문에 미국 사립대학생들의 부모의 70% 정도가 억대 연봉자라는 보도를 접했다. 물론 억대 연봉으로도 등록금을 감담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학생들 대부분은 대학 학비의 전액 혹은 일정부분을 LOAN의 형태로 빌려 학교를 다니게 되고 그런식으로 사회첫발을 채무자로 딛게 되는 일반적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재밌는 것은 미국에서 한명의 수감자를 감옥에 수용하기 위해서 드는 비용이 1년에 $ 16,000 정도란다. 왠만한 주립대학은 보낼만한 돈을 감옥 운영에 쓸 바에야, 교육을 위해 사용하라는 논리적으로는 조금 빈약한 주장이 간간히 미국인들 입에서 터져나오곤 한다.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미국 대학의  수업료 인상에도 아랑 곳 하지 않는 한국 학부모들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 돈을 내면서도 유학을 보낼 수 있는 한국 부모들이 많고 또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과, 연일 한국 신문에 나오는 "경제 불황"에 대한 조중동류의 기사들(갑자기 서민적인 톤이되는)이 겹쳐질 때면 세상살이란 역시 함께 다른 세상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라도 오해 할 수 있어 덧붙여 두자면, 내가 수업에서 만난 한국 학부생들은 대부분 열심히 공부하고 개인적 능력이 출중한 학생들이었다. 온실에서 잘 큰 화초 같은 느낌이었달까?

최소한 한국처럼 "학벌"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닌 미국 시장에서 틀 잡힌 "취업공장"의 메커니즘은 간혹 놀랍기까지 하다.
물론 학생들도 자신의 수업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나 현실은 점점 더 기업화되는 것이 미국대학이고, 한국에서는 어설프게 그 모델을 따라갈려고 애쓰다 보니 죽도 밥도 안되가고 있다는 사실. 돈 쌓아놓고 등록금 올리는 한국의 사학에는 웃음 밖에 안나올 따름이다. 어차피 기업형 대학이 될 것이라면, 비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2007년 2월 21일 수요일

"욱"과 "악"사이

"대선의 해"라고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요즘 보면,

노무현은 "선생"이 되지 못해 안달인 "짱"인 것 같고,  유시민은 여전히 "학출 평론가"인 듯 하다.
유시민도 국민일보 기자와 이야기 하면서 노무현이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니 "선생"이 되고 싶은 노무현의 안달은, 그에게 다른 지도자모델이 없었으니 이해가 가다가도, 대통령질을 하면서 국민들을 가르치려드는 "선생"이고 싶어해왔으니, 대통령질은  "교생실습"이 아니라고 또 어찌 깨닫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사실 이미 국민이 가르쳐줬는지도 모르는데, 그 학습 효과가 미미하거나 없으니 국민이 틀렸다고 해야할라나?

유시민은 역시 "먹물" 끼를 못 벗어나는데, 개혁당 할 때 좀 바뀌나 했더니 역시 의원직을 가지게 되더니 다시 스물스물 자기 버릇이 나오는 듯.
문제는 이게 기본적으로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이라는 기본적 윤리의식을 거스르는 것으로 보이고, 그러다 보니까 도매금에 전여옥하고 "이인 삼각조"로 보이게 되는데, 요즘은 거의 노무현의 "장세동"으로 마감하고 싶어하는 듯. "짱" 죽을 때 따라 죽겠다는 자세는 가상한데, 짱이 안죽을 상황을 만드는게 수족들이 할 일이거늘 (의리파라면). 먹물이 자꾸 "몸빵" "입빵"으로 때울려고 하니까 그게 되겠나?

어쨌든 둘이 비슷한 것은 자기 확신에만 기대어 선 신념에 불타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라는 점.

이념적으로는 둘 다 "여백의 질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한때 유행했던 정세 분석용 언어를 써보자면, 이른바 자유주의 부르조아지 혹은 좌파 부르조아지로서,

그들의 몰락은 실상 그들만의 "자기 실현"이란 비젼과 다중의 욕망이 교차하는 우연성이 끝나는 순간 시작되었 던 듯.

강준만의 말에 따르면 우리사회엔 "욱" 민주주의가 있다는데, 국민들이 "욱"해서 한쪽으로 쏠려  합리적 토론이 안되는  국민성 같은게 있다는구만.
유시민도 비슷한 논리를 정치적으로 해석해 내는데, 누가 학출 아니랄까봐 지식인도 사전 찾아봐야 할 "용린"이란 표현으로 정치인의 흥망성쇄를 가늠한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엔 잘 못 건들면 한방에 죽어버리는 정치 뇌관이 있다는 것이고. 결국 정치가는 몸 조심, 입조심 해야한다는 것인데. 이점에서 자기는 이왕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그렇게 보니 성찰적이긴 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어쨌든 이걸 보고 있자니 이 두 먹물의 공통점은 우리 국민들의 반이성주의적 광기가 아주 정치를 힘들게 한다는 불평을 하는 셈인데, 아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나 오다가도, 정치란 항상 대중의 광기에 의존하면서 그 광기의 통제를 하는 게임일 테니 넓게 보면 그들도 뭔가 보긴 본 것이 틀림 없으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똥인지 된장인지를 항상 헤깔려 하고 귀신 봤다고 젠체하는 그들의 공통점이 상황을 짜증나게 만들 뿐이다.
하여간 어이없는 먹물 근성들 하고는..

각설하고, "우리"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항상 어떤 "국민성"을 생산하기는 하니까,

두 알량한 정치평론가들의 논지를 따라, 재미삼아 비교를 해보자면,

노무현과 유시민은 "악" 정치 그리니까 "악쓰는" 정치를 해온 것인데,

"욱"과 "악"
그거 참. 모음 하나 차인데

2007년 2월 19일 월요일

[세계일보] 스탈린은 예비성직자이자 '시인'이었다

스탈린에 대한 기사가 왜 난데 없이 그것도 세계일보에 났을까 했더니, 고려인 강제 이주 70주년이란다.
강제이주에 대한 부분은 일단 다음에 기회되면 고민해보기로 하고,
이 스탈린이 요즘 내 머리 속에도 자주 등장했다. 스탈린 주의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종말을 가져왔다는 흔한 비판은 사실 손 쉬운 것이어서 더이상 할 말은 없고, 기사에서 잠깐 언급한 것 마냥 "멀쩡했던" 스탈린이 그렇게 변해갔던 정치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문제시 될 필요가 있을 듯.
스탈린이 독살됐네 하는 최근의 이야기도 있지만,
어찌되었던 스탈린주의도 대중의 광기가 없었으면 불가능 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박정희 주의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른바 레드테러라고 불리우는 시기..(솔직히 이그나티에프라는 잘나가는 캐나다인이 자꾸 레드테러 레드테러 해대서 좀 불편해 하고 있는 중이다.) ....냉전시대 백색테러를 무색케하는 역사로 기록되어 되버렸지만..
쪽수로 대비를 한번 해줘야 하나?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인 듯. 그저 전시공산주의의 딜레마였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말이지...

박노자의 글을 보니, 트로츠키도 비운의 혁명가로만 보기엔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아.. 스탈린시대에 새롭게 재정된 러시아 "국가"의 역사가 궁금하다. 인터내셔날가를 포기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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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예비성직자이자 '시인'이었다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꽃이여, 아 나의 그루지아여!/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친구들이여 노력해/ 빛내라 조국을!”

소련의 초기 지도자 스탈린의 시(詩) ‘아침’이다. 믿어지는가. 히틀러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 러시아 혁명을 ‘반혁명’으로 뒤집은 세기의 무단아 스탈린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썼다니…….

사실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알고, 혁명가가 되기 이전엔 시인이었다. 그것도 성직자를 꿈꾸던 신학생 시인이었다. 그의 성장 배경과 환경을 보면 기가차다. 한 혁명가, 독재자가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는지 전범(全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878년 12월 6일 그루지야의 소도시 고리에서 스탈린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삶의 낙오자이자 비참한 주정뱅이였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아버지 베사리온은 구두장이였다. 성질이 불 같았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구둣방이 실패하여 문을 닫자, 술을 퍼마시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비참한 가장이었다.

스탈린은 언젠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또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곤 자기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칼은 아버지를 빗나갔다. 잔뜩 화가 난 베사리온이 이오시프에게 달려들었으나 동작이 느려 그를 잡지 못했다. 이오시프는 그 길로 달아나 아버지의 화가 제풀에 풀릴 때까지 이웃에 숨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이오시프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열 살 때 종교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으나,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에게 호소해 아들을 구두공장에서 되찾아왔다. 어머니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16살이던 1894년 그루지야 수도의 티플리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직자 교육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스탈린은 이미 1학년 때 신문에 시를 발표해 그루지야 문인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가 다룬 주제는 자연과 대지, 애국심이었다.

그루지야 문학 세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시인 스탈린은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레닌 등의 책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신념과 시에 대한 열정을 버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학교 졸업을 앞둔 1899년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뒤로 하고 혁명가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는 평생 맹렬하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역사적인 인물, 특히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에 관한 책들은 수없이 읽었으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주석을 달아 가며 꼼꼼히 읽었다. 감옥에서도 유형지에서도 심지어 내전 때 전장에서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내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개정판을 가지고 다녔다. 이 책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그 내용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책 가장자리에 메모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당이 프롤레타리아의 의지에 반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프롤레타리아는 전위 없이는, 유일한 (당인) 당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를 수 없다.”

그의 지적 관심은 문학, 역사, 경제, 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사 전략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 얼마 안 가 군사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 주로 사회주의 이념을 다룬 저작을 써 온 스탈린이 1950년에 러시아 민족의 언어를 다룬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경쟁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스탈린은 글을 유려하고 논리적이고 사려 깊게 쓰는 지식인이었다.

1899년 혁명 운동에 뛰어든 스탈린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스스로 두각을 나타냈다. 비밀 지하 활동과 비합법적인 선전,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조하는 스탈린은 영락없는 미래의 볼셰비키였다(볼셰비키 파는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 성립된다). 1902년 4월 처음 체포된 이후로 그는 몇 번의 체포와 유형, 탈출을 반복했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이미 스탈린은 그루지야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조직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1912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스탈린은 레닌의 요청으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프라우다’를 창간하고 편집인을 맡았다. 마침내 볼셰비키 핵심 지도부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스탈린’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철(stal)’을 뜻하는 러시아 이름이었다. 수도에서 정력적으로 볼셰비키 활동을 이끌던 그는 1913년 2월 마지막으로 체포돼 시베리아 북동쪽 끝 투루한스크로 유형을 떠났다. 그는 제정이 무너진 1917년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소탈하고 겸손한 혁명가였다. 그는 지적으로 탁월한 다른 혁명가들처럼 거만하지 않은 동지였으며, 순박한 태도로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친근한 동료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코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는 신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어떤 분위기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냉정하고 과묵한 그는 자신에 대한 경쟁자의 신랄한 비판 앞에서 분노를 감추고 인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자제력은 동료들 사이에서 전설적이었다.

스탈린은 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레닌을 숭배하였다. 1905년 핀란드에서 레닌을 만난 이후 스탈린은 레닌의 충복으로서 믿음직스럽게 임무를 수행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로 강도질을 하기도 했다. 두 그룹의 강도 집단을 이끈 스탈린은 사기, 강탈, 무장 강도를 통해 계속 당의 자금을 모았으며, 1907년 6월에는 지폐 운반 마차를 털어 25만 루블을 강탈해 레닌에게 보냈다.

레닌은 민족 문제 측면에서 스탈린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레닌은 스탈린이 1913년에 발표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좋아했는데, 비러시아인에게 자율적인 행정권을 주어야 한다는 해결책이 자신의 의견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민족 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예리한 분석은 레닌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국가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주의가 필요 없다며 트로츠키가 촉발시킨 노동조합 논쟁으로 분파 간 논쟁이 격화되자 위기를 느낀 레닌은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좌익 반대파 등 수많은 분파로 당이 갈라지면서 신생 소비에트 국가가 안으로 붕괴할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지방에서 레닌주의 지지자들을 조직한 스탈린의 도움으로 레닌파는 1921년 당 대회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중앙 당 기구를 확실하게 장악할 사람이 필요했던 레닌은 스탈린을 당 서기장에 올리는 안을 직접 제출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자신이야말로 레닌의 적자라고 자임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목숨을 건 정통성 경쟁을 벌였다.

뛰어난 연설 능력과 지적인 능력으로 혁명가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트로츠키와 그루지야 시골에서 올라온 교양 없는 촌놈으로 폄하되었던 스탈린은 10월혁명 직후부터 사사건건 부딪쳤다. 내전 시기에 트로츠키가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장교들을 붉은 군대에 받아들인 것은 투철한 계급 투사 스탈린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맞선 스탈린은 레닌이 도입한 신경제정책을 두고도 맹렬한 논쟁을 벌였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는 권력 투쟁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보였으나, 실제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하부에서 당원들을 설득하고, 자기 세력을 조직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그 누구도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 예상 못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레닌조차도. 그러나 스탈린은 권력의 생리를 동물적 감각으로 꿰뚫어본 정치의 천재였다. 권력 작동의 법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그는 권력의 하부를 장악했다. 일반 당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각 하부 단위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함으로써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스탈린은 강한 적과 연합하여 더 강한 적을 거꾸러뜨리는 이이제이 수법을 탁월하게 적용하였다. 그는 먼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해 트로츠키란 가장 강력한 적수의 힘을 제거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물리쳤다. 이때 연합 세력이었던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력화시켰다. 그는 서서히 노회한 혁명 투사들을 권력 핵심에서 제거하고 대신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끌어올렸다.

최고 권력자가 된 스탈린은 단 한 차례의 위기도 없이 자기 의지를 관철한 전제 권력자였다. 그는 공포를 일상화하여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자신이 겪은 시베리아 유형보다 훨씬 가혹한 강제노동수용소를 만들어 혁명 동지들, 의심이 가는 잠재적 배신자들을 몰아넣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공포 정치 기간에 약 150만 명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되었고, 이중 75만 명이 총탄 세례를 받고 사라졌다. 스탈린은 레닌 시절에 만들어진 좌익 반대파, 우익 반대파,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등등 모든 형태의 반대파들을 뿌리 끝까지 추적해 완전히 제거했다. 분파주의의 뿌리털도 남겨놓지 않고 도려내버린 비정한 근정 정치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한의 공포였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5개년 계획을 실시한 1928년부터 1940년 사이 소련의 공업 성장은 연평균 12∼14%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공업 생산량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국가로 부상하였다. 성공적인 산업화로 소련은 낙후한 농업국가에서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로 올라설 수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성장은 테러에 의한 국민 동원이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도달한 것이었으며, 그 뒤에서는 농민, 노동자, 정치적 반대파, 소수 민족들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러시아사 연구의 권위자 로버트 서비스가 30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공포의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삶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전기 '스탈린, 강철 권력'(교양인)에 담겨 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