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게 추운 날이었다. 내가 대학로에 갔던 날은.
좀 호러틱 하게 말하자면 온몸을 칭칭 동여매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물어 뜯고 싶을 정도였는데, 뜨거운 피가 콸콸 쏟아져나와 날 덥힐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호객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여러 극단들이 공동 선언 비슷한 것을 하며 자정노력을 하기로 했다던데, 그래도 혜화역 2번 출구로 올라오자 마자 들려오는 소리는 "지금 곧 시작합니다, 연극 000. 연극 보러 오셨어요? 이거 한번 보세요" 였다. 꽁꽁얼어 붙은 거리에서 바삐 움직이는 발들과 주머니에 들어가 빠져나올지 모르는 손들은 따라오는 호객꾼들을 이리저리 흩어놓을 뿐 별다른 영향력은 없었다.
한편에서 보면, 추위 속에서 고생하는 이 호객꾼들은 많은 매체가 이른바 "연예인"출연작들에만 관심을 가질 뿐 무명 배우들과 영세 극단들에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보이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보다 많아졌다는 관객들도 여전히 "나 누구 봤다" 수준에서 작품을 선정하고 말이다.
어쨌든 나도 별반 다르지 않게, 동행자가 보고 싶었했던 <웃음의 대학>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내가 봤던 날은 안수찬과 백원길이 출연하였는데, 안수찬은 이래저래 TV에서 낯이 익은 그런 배우였다.
연극 내용은 대충 아래 블로그를 참조.
http://cafe.naver.com/museonand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020 오랜만에 본 연극이었는데, 솔직히 나는 좀 그저 그랬다.
평일 공연이었음에도 객석 점유율이 상당히 좋았고 연기도 연출도 나름 깔끔하단 느낌이 들었지만,
뭐랄까 너무 매끈하달까?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원작을 "착실히" 해석한 작품이고, 두명의 배우도 "성실히"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웃음"의 대학이었지만, 그닥 웃기지 않아서일까? (내 앞줄 몇몇 아주머니 관객들은 아주 좋아하셨다. 역시 아저씨들 끼리만 연극 보러온 관객은 없었고.)
간단히 말하자면, Fairly tale 을 본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꾸 내가 이 연극을 어디선가 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진부함이 때때로 몰려왔다.
일본원작을 한국적으로 과감히 재해석 했었다면 어땠을까 싶던데, 지금이 무슨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도 아니고 아니 어쩌면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의 일본사회는 우리의 경험속에서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와 닮아 있음에도 스토리를 굳이 "이국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다.
나중에 보니까 대학로의 상당수 연극들이 해외의 작품을 가져다 그대로 공연하는 것도 같던데, 새로운 희곡과 연출이 사라지고, 인지도 높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연기"만이 중심이 되는 한 연극 무대는 영화나 TV드라마에 배우 대주는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의심도 들었다.
모 인디 밴드가 공중파에 출연섭외를 받은 후에, PD로 부터 그들 대표 히트곡의 가사를 고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공중파 방송에 부적절하다는 PD자신의 자기검열 때문이었는데, "미쳤어"라는 가사를 그러면 "솔쳤어"라고 바꾸란 말인가 해서 모두가 웃고 말았다.
이처럼 <웃음의 대학>이 다루는 검열 상황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최근엔 이 "낡은 시스템"이 아주 뻔뻔스럽게도 작동하는 것을 상기한다면, 연극무대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낯익은 배우가 보여주는 깔끔한 연기에만 제한하는 것은 좀 문제적이지 않을까?
찾아 보니 이 연극은 일본에서 영화화도 되었었나 보다. 그럼 이젠 좀 원작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때도 되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