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1일 일요일

Wine chart: Elegant/soft to Rich&Bold

와인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내가 Pinot Noir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영화 Sideways 때문이다. (한국영화중에는 칠레산 와인에 대한 편견을 깨준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문제는 Pinot Noir를 한번 시음해 보고자 해도 그 가격에 대체로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10 아래에서는 좀 처럼 찾기 힘든 와인이 Pinot Noir 인데, 아무데나 자라는 품종이 아니라서 그런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어쨌든 대중적인 와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고, 해서 $10 아래 와인 아니면 살 능력이 안되는 내가 여러 마트의 와인 코너를 두루 조사하고 시음해 본 결과 가격대비 최고의 맛을 내주는 와인하나를 찾아 냈는데 그것이 California 산 Redwood Creek Pinot Noir 다.



저가 와인라 Vintage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요즘은 2009년산이 마트에 풀리고 있는 것 같다. 

저가와인을 마시다보면 wine decanter 하나를 사고 싶다는 욕구가 ....

2012년 3월 10일 토요일

"대박" 공화국. 선거. 정치.

어느새 선거철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기사중의 하나가 "대박"기사이다. 

"강달프 펀드 대박" "강용석 펀드...연 6% 수익에 조기마감..." 

유시민이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시도한 이후, 이른바 자본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 시스템을 활용한 "파생상품"으로 "선거펀드" "당원펀드"가 남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참여선거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인데, 그건 아무데나 "참여"를 가져다 붙여서 결국 재벌과 금융자본만 배불렀던 "참여정부"식 참여다. 이러한 방식의 선거 파생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에 정치를 넘겨주는 또다른 "금권"정치인데다가, 자본가 세력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거의 수익성"이라는 관념을 모든 개개인에 까지 파급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시말해,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선거문화"의 한 표상일 뿐이다.  

파생상품을 만들어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꼼수"가 이런방식으로 일반화되고 나면, 선거는  "돈 놓고 돈먹는" 잔치가 되고, 정치인이나 정당은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다. "정책이고 이념이고 지랄이고" 오직 "득표율"만이 중요하게 된다는 말이다. 

더더욱 문제는 이른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진보신당까지도 이 무개념 "펀드"를 거리낌없이 운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득표율 만큼 이자로 돌려드립니다" 
처음 이 광고를 보고서 무슨 패러디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이자"와 "이윤율"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관점이라도 있는 "진보"라면 저런 광고를 할 수는 없다. 
진보의 꿈을 정치적 희망을 "이윤율"에 넘겨주다니 이게 제정신인 사람들의 진보정치일까? 

기본적으로 "선거 공영제"라는 문제는 진보정당부터 망각한지 오랜 것 같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저 왼쪽 구석에 보이지도 않게 쓰여져 있는 "다른 당은 돈으로 지지율을 올리지만 우리 당은 사람으로 지지율을 올린다"는 풀뜯어 먹는 소리는 또 무슨 이율배반인가? 

"3%미만일 때는 원금이 특별당비로 납부됩니다" 
진보신당이 이번 총선에서 3% 득표율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정치평론가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당원펀드는 특별당비의 다른 이름이자 모두가 "꽝"일 수 있는 "경품행사"이다. 

이게 반신자유주의, 반자본주의를 모색하는 진보신당의 모습이란 말인가? 

재정난을 타개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쁘띠적 상상력"에 의존하고 무개념적 "모방"을 시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진보의 정신은 뿌리부터 썩어들어갈 것이다. 

"특별당비"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안되는가? 
보수정치를 비판하고, "진보 정치의 정신"을 망각한 이들을 비판하며, 힘든 소수정당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면, "소멸의 위기"에서 조차 원칙을 지키며 더 철저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진보신당! 정신줄은 놓지말자!

2012년 3월 4일 일요일

대관절 "섬세함"이란게 무엇인가?


진보신당의 홍세화 대표가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 출연했다고 해서 유투브를 통해 시청했다. 비디오 클립을 끝까지 다 보는게 솔직히 힘들었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김어준 말마따나, 도대체 "진보신당" 인간들은 무슨 생각으로 홍세화를 "대표"로 "모셨"을까? 고심끝에 내린 당신의 결정이니 "관심있으면 긴 글"인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를 한번 읽어보라고 강요하는 홍세화 선생의 난감함은 차지 하더라도, 그를 황급히 대표로 만들어놓은 진보신당이나,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라 어색함으로 복창터지게 하는 홍세화나 둘 다 복창터지긴 매한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직접적으로는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으면 최선을 다하기나 하지, "내려올 궁리"만 하는 듯 해보이는 "지식인" 홍세화에 더 화가 났다고 말해야겠다. "시대적 소명" 따윈 보수정치가들도 즐겨 읊는 주문이다. 얼굴마담이면 마담스럽던가! 난파선에 올라, 선장이 되어서는 "우리는 이대로 사라질 수 없습니다"만 되뇌고 있으면 이게 무슨 정신승리 리더쉽인가?

지젝을 운운하는 것 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와 사회에 대한) 섬세함"이 부족하다며 그 "섬세함"을 위해 진보신당을 지켜내야한다고 되뇌이는 부분은 가히 홍세화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어법승리의 명장면이었다.

대저 "섬세함"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파스칼이 "교양있는 사교인들에게서 발견했다"는 그 "섬세의 정신(esprit de finesse)" 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래... 똘레랑스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들여올 것이 섬세의 정신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것이 정당정치, 그것도 특정 정치세력인 "진보신당"에 있다고 말해버리는 것이 "섬세의 정신"이라면 파스칼이 택시타고 쫒아올 일이다. 솔직히 상당수가 섬세의 정신 혹은 홍세화가 제기하는 "섬세함"을 이해할 길이 있을까도 싶지만, 지젝말고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다. 김어준이 그 특유의 동물적 감각으로 지적한 것 처럼, 인식론으로 구성할 것은  "학파"이지 정치단체가 아니다. 아니 최대치로써는 그냥 "정신계몽"을 주목적으로 하는 운동단체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가 정말 속터져 죽는 줄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많은 이들이 홍세화가 무슨말을 했던 "저사람은 어쩔 수 없이 대표를 맡은 사람" "당 해체를 막아내려는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정도는 받았다는 것이랄까?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진보는 분열해서 다수가 된다"는 그의 입장은 무분별한 통합론에 대한 비판으로 꺼내 놓은 것 같은데, 당장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결정도 설명하지 못하는 논리이자 민노당에서 분리해 나온 진보신당의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를 포기한 입장이다. 홍세화의 낙관론은 역설적으로 자기 정체성의 혼란에서 온 것도 같은데, 분명히해야 할것은 "진보정치세력"으로서 정당(그것도 "진보신당")과 "진보" 일반은 개념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다. 보수도 분열해서 다수가 된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분열은 원래 그 자체로 증식 혹은 소멸의 한 과정일 뿐이지, 특정한 결과를 낳는 일반적인 과정이 아니다.

어차피 논리와 상황의 문제이므로 "과정"은 더더욱 결정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는 분열과 통합이라는 문제가 똑같이 "과정"이라고 말해야 했다. 통합도 목표가 될 수 없고, 분열도 마찬가지니까. 원래 "다수"와 "소수"문제는 통합과 분열과는 무관한 것이기도 하다. 또 "다수" "소수"도 세상이 말하듯 단순히 쪽수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역사에도 있지 않은가? 볼세비키는 실제론 소수였음에도 "다수파 (볼세비키)"를 자처하기도 했었다.

중요한 문제는 정치적 입장과 이념이 원래 다수"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존재론적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진보적" 욕망은 다수적인게 지극히 당연하다. 똘레랑스나 섬세의 정신같은 것에 푹 빠져있는 "(자칭) 서생" 홍세화는 그 당연한 사실을 정당대표의 위치에서 조차 관념으로 대체해버리는 것 같다. "(거대) 담론의 해체"를 통한 "다수화"의 문제와 "다수(적으)로 남아 있는 주체"들의 문제는 상이한 것이다. 정당은 그것이 정치적 주체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기능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이미 다수적인 욕망들의 장소이며, 다수인 정치적 주체들의 "피델리티 fidelity"를 생산해내는 것이 주된 임무여야한다. 다시말해 "증식"이 목표인 집합체라는 것인데, "분열"의 일상화를 당연시하게 되면, 그나마 남은 "분열해서 진보가 된다"조차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생각의 좌표"가 정당정치와는 애초에 안맞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자.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엔 안올라가는게 "진보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