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4일 일요일
대관절 "섬세함"이란게 무엇인가?
진보신당의 홍세화 대표가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 출연했다고 해서 유투브를 통해 시청했다. 비디오 클립을 끝까지 다 보는게 솔직히 힘들었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김어준 말마따나, 도대체 "진보신당" 인간들은 무슨 생각으로 홍세화를 "대표"로 "모셨"을까? 고심끝에 내린 당신의 결정이니 "관심있으면 긴 글"인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를 한번 읽어보라고 강요하는 홍세화 선생의 난감함은 차지 하더라도, 그를 황급히 대표로 만들어놓은 진보신당이나,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라 어색함으로 복창터지게 하는 홍세화나 둘 다 복창터지긴 매한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직접적으로는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으면 최선을 다하기나 하지, "내려올 궁리"만 하는 듯 해보이는 "지식인" 홍세화에 더 화가 났다고 말해야겠다. "시대적 소명" 따윈 보수정치가들도 즐겨 읊는 주문이다. 얼굴마담이면 마담스럽던가! 난파선에 올라, 선장이 되어서는 "우리는 이대로 사라질 수 없습니다"만 되뇌고 있으면 이게 무슨 정신승리 리더쉽인가?
지젝을 운운하는 것 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와 사회에 대한) 섬세함"이 부족하다며 그 "섬세함"을 위해 진보신당을 지켜내야한다고 되뇌이는 부분은 가히 홍세화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어법승리의 명장면이었다.
대저 "섬세함"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파스칼이 "교양있는 사교인들에게서 발견했다"는 그 "섬세의 정신(esprit de finesse)" 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래... 똘레랑스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들여올 것이 섬세의 정신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것이 정당정치, 그것도 특정 정치세력인 "진보신당"에 있다고 말해버리는 것이 "섬세의 정신"이라면 파스칼이 택시타고 쫒아올 일이다. 솔직히 상당수가 섬세의 정신 혹은 홍세화가 제기하는 "섬세함"을 이해할 길이 있을까도 싶지만, 지젝말고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다. 김어준이 그 특유의 동물적 감각으로 지적한 것 처럼, 인식론으로 구성할 것은 "학파"이지 정치단체가 아니다. 아니 최대치로써는 그냥 "정신계몽"을 주목적으로 하는 운동단체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가 정말 속터져 죽는 줄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많은 이들이 홍세화가 무슨말을 했던 "저사람은 어쩔 수 없이 대표를 맡은 사람" "당 해체를 막아내려는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정도는 받았다는 것이랄까?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진보는 분열해서 다수가 된다"는 그의 입장은 무분별한 통합론에 대한 비판으로 꺼내 놓은 것 같은데, 당장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결정도 설명하지 못하는 논리이자 민노당에서 분리해 나온 진보신당의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를 포기한 입장이다. 홍세화의 낙관론은 역설적으로 자기 정체성의 혼란에서 온 것도 같은데, 분명히해야 할것은 "진보정치세력"으로서 정당(그것도 "진보신당")과 "진보" 일반은 개념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다. 보수도 분열해서 다수가 된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분열은 원래 그 자체로 증식 혹은 소멸의 한 과정일 뿐이지, 특정한 결과를 낳는 일반적인 과정이 아니다.
어차피 논리와 상황의 문제이므로 "과정"은 더더욱 결정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는 분열과 통합이라는 문제가 똑같이 "과정"이라고 말해야 했다. 통합도 목표가 될 수 없고, 분열도 마찬가지니까. 원래 "다수"와 "소수"문제는 통합과 분열과는 무관한 것이기도 하다. 또 "다수" "소수"도 세상이 말하듯 단순히 쪽수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역사에도 있지 않은가? 볼세비키는 실제론 소수였음에도 "다수파 (볼세비키)"를 자처하기도 했었다.
중요한 문제는 정치적 입장과 이념이 원래 다수"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존재론적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진보적" 욕망은 다수적인게 지극히 당연하다. 똘레랑스나 섬세의 정신같은 것에 푹 빠져있는 "(자칭) 서생" 홍세화는 그 당연한 사실을 정당대표의 위치에서 조차 관념으로 대체해버리는 것 같다. "(거대) 담론의 해체"를 통한 "다수화"의 문제와 "다수(적으)로 남아 있는 주체"들의 문제는 상이한 것이다. 정당은 그것이 정치적 주체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기능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이미 다수적인 욕망들의 장소이며, 다수인 정치적 주체들의 "피델리티 fidelity"를 생산해내는 것이 주된 임무여야한다. 다시말해 "증식"이 목표인 집합체라는 것인데, "분열"의 일상화를 당연시하게 되면, 그나마 남은 "분열해서 진보가 된다"조차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생각의 좌표"가 정당정치와는 애초에 안맞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자.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엔 안올라가는게 "진보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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