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16일 월요일

"감동적"이야.

그러고 보면 나라는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내 감정의 언어들은 마치 갱지위에 등사된 언어들 같다고나 할까?

슬퍼. 재밌어. 웃겨. 그저그래. 뭐...

그거 참 감동적인던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이 꽃들 봐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라고 말하는 인간에게서 종종 느끼는 것 마냥 내 몸의 털들이 일어나 깃털이 되는 것 같다.
뭐랄까 내게 감동은 이를테면 언어화 될 수 없는 어떤 진정성이랄까? 마치 고통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다고 믿고 싶어지는. 물론 "진정한 것"들이 항상 특별하지는 않다. 괴테와 맑스를 따라 그저 그렇게 "오직 푸르른 것은 저소나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

요즘 읽고 있는 책을 통해 다시 떠오른 마르뀌 드 사드의 소돔 120일에서도 고통은 심지어 "비명"이란 표현 속에서도 불분명한 지극히 육체적인 것인 것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사족이지만 사드는 참 물건이다. 그 깜직함이란!) 육체적인 감각들도 무뎌지고 정신적인 감각들도 무덤덤 해진다. 어쨌든 실상 언어적인 것으로 붙잡히긴 힘든 어떤 감정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씩 몸의 기억과 반응을 언어화 시키고 싶을 때도 있는데, 발화하는 그 순간에 밀려오는 소름. 언어가 되고 나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의 공포감이 자꾸 목구멍을 가로 막고 손을 마비시킨다.

감동의 모호함에 대하여 단지 모호함을 찬양하거나 동어반복의 습관적 표현들에 만족해야만 할까?
감동은 그런데 전이되는 것일까? 다중적으로 생성되는 것일까? 당신에게 감동을 전한다는 수사는 어쨌든 한 갓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마치 이성이 그렇듯 감정도 생성의 조건과 동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할 테고, 육체의 오르가즘이 정신을 풀어 놓 듯, "감동"도 할 말을 잃은 정신이 육체를 풀어 놓기도 하는 것 일까?

그러고보니 오르가즘에 대응하는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이 있었군!
오르가즘이 몸을 정화하던가??? 어째 감동은 정화인가?

사드를 따라, "정화조"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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