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31일 월요일
"태안" 기름 제거 자원봉사에 대한 "불편한 심기"
최근 기사를 보니, 태안에 몰려드는 자원봉사들로 인해 숙박할 곳이 남아 나질 않는 모양이고, 자원봉사를 "조직"하는 환경운동연합 같은 단체들에는 주말 "자원봉사 예약" 문의가 쇄도하고 정원이 가득차 "빈자리"가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경이로운 일이다. 한국민 드디어 OECD "상위권" 수준의 "성숙한" 국민 교양의식을 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게 되었고, 자연을 "벗"하며 살아온 위대한 "한민족"의 저력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아니할 수 없다.
진정 한국인의 "환경의식"이 이처럼 고양된 때가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다. 산 속에 백숙집 차리기 경쟁하며 "재산권"을 주장하고, 야생동물 체액 빨러 해외원정까지 마다않던 그런 "낡은" 이미지를 단방에 씻어내는 국가적 "이벤트"이자 위기를 극복하는 집단적 "슬기"를 보여주는 쾌거가 아닐수 없다.
역사적으로는 이승만의 식목일 제정 (아이러니하게 한국전쟁 바로 한해 전이었던 1949년), 박정희의 "자연보호헌장" 제정(이것도 아이러니하게 시바스리갈 권총파티 1년전이었던 1978년. 그 파티는 알려지다 시피 "우리" 대통령 당선자 이병박씨가 성공신화를 써가던 현대건설의 아산만 간척 사업을 "축하"하던 뒤풀이었다) 그리고 세련된 CEO 문국현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환경보호가 자본 이윤증식에 도움을 준다는 "선구안"을 가졌던, 생리대뿐만 아니라 자본에도 날개를 달줄 알았던, 하여 70억 사재를 선거에 "몰빵"하는 지위에까지 올랐던) 까지가 이제서야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편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했으니(그것도 제헌절 제외보다 1년이나 일찍 ! 고로 자연-환경은 법 앞에 꿀린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오늘날 대중적 환경의식의 "결정적" 고양을 외면한 대가로 정치적 몰락과 대선패배를 부여안게 된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고생들까지도 이렇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환경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거역"했으니 노동 일수 늘려주는 조치로 구시대적 구애를 자본에 하고 있었던 "바보 노무현 정부"는 역시 퇴출이 운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새로운 "환경지킴이의 날"을 만들어도 쉬원찮을 판에 말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이 "태안 자원봉사"가 한국에서 환경운동의 "결정적" 경계선을 대중의 정치의식 내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 아이러니는 그러니까 새만금 개발 사업에 침묵하던 사람들, "서해 똥물"이 바다냐며 동해에서 제주도에서만 짜가 "카리브의 낭만"을 찾던 사람들에게 이 "느닷없는" 환경지킴이로의 자기 정체화가 내용없는 명찰을 가슴에 다는 것으로 끝나게되고 결국 그 명찰에는 "국토사랑"이라는 이승만이래 지속된 민족주의적 환경론이 아로새겨질 것 같다는 우려를 낳는다. "온국민의 위대한 힘"을 확인하는 어떤 강박이 "국토사랑"으로 제한된 어떤 논리가 이 "자원봉사"에 묻어나 보인다.
물론 그래서 바다를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일련의 활동의 실질적, 혹은 선/후행 봉사논리여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삼성과 정부에 책임을 묻는 논리가 "봉사"에 파묻히는 상황이야말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재결합의 장 아니겠는가? 도대체 어민들이 어떻게 지켜낸(관리해 온) 서해바다던가? 안면도, 부안으로 이어지는 투쟁이 지역이기주의로 매도당하던 역사는 이제 끝날 것인가?
일련의 보도를 읽다가 드는 생각은 도대체 태안 주민들의 분노와 절규의 정치적 공간이 안보인다는 것이다. 서해바다가 삶의 터전인 이들의 목소리는 정작 없고, 봉사자들의 영웅적 미담들만 넘쳐난다. 혹시 줄서서 "안절부절"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봉사자"들의 인도주의, 환경주의가 태안 주민들의 분노를 순식간에 어떤 천박한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인도주의적 "봉사"가 원유누출 사고를 "천재지변"과 비슷한 것으로 그러니까 자본주의 이윤추구와 국가 관리 시스템의 붕괴를 문자적 의미의 "불행"으로 탈바꿈 시켜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자원 봉사"에 대한 감격어린 기사들 행간에 새롭다기 보다는 진부한 논리(국토사랑, 자본주의적 교양등등)가 새로운 대상(환경)을 찾아 새련되게 작동하다고 여겨진다. 벌써 태안의 숙박업계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때아닌 소득증대"가 어민들의 "좌절"과 분리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왜 사람들은 정부나 삼성에 교통비나 하루 일당을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왜 자신의 소중한 주말 휴식을 자본가의 피해보상액을 줄여주거나,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데 "기꺼이" 사용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대목에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대상화된 환경주의의 교차점들이 놓여 있고, 이승만 이래 환경주의를 포섭하려했던 지난한 정치적 기획의 일정한 성과가 그 위에 표출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한국민의 위대한 "환경 의식"에 열광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이다.
"계열사 직원"들까지 열심히 "방제"작업에 참여하는 삼성그룹의 이미지 한편에, 분노와 절규로 그 작업 참여를 거부하는 어선들 (http://stock.moneytoday.co.kr/view/mtview.php?no=2007121113334930519&type=1&TVEC)을 단순 병치해 놓고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진부한 시선"의 작동을 이번 "자원봉사" 열광이 바꿔 내지는 못할 것 같아 보이고 그것이 이른바 "순수한" 환경주의의 대중적 경계로 아로새겨질 것 같은 기우를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렇다! 나는 적어도 삼성을 위해 국가주의를 위해서는 기름때를 내 옷에 묻히고 싶지 않다.
자가용으로 "기름" 써가며 서해까지 달려와 기름 묻은 차 세차 걱정하고, 합성세제로 기름때 지울 걱정을 기꺼이 하는 "봉사"는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기름도 안나오는 나라에서 기름을 펑펑써대는 중형차들엔 그리도 열광들 하시는가? 이명박이 기름값 내려준다고 열광하는 저열함은 무엇인가? 왜 위험하게 해상수송을 선택(고집)하는 자본과 정부에 분노하지 않는가? 남북 송유관, 대륙 송유관 연결등은 왜 항상 "스캔달"정도로만 한국정치에 등장하는가?
무엇보다 왜 기름을 바다에 쏟을지도 모르는 우리내 에너지 환경에는 스스로 성찰하지 못하느냔 말이다.
억지로 뙤약볕에 아카시아 나무들을 심으러 동원 되었던 사람들과의 차이가 이젠 "자원봉사"의 이름 밖에 없어서야 쓸것인가하는 생각이 얼굴에 기름때 묻은 "해맑은 얼굴"위로 내 "불편한 심기"를 조장한다.
2007년 12월 8일 토요일
문국현과 단일화 논쟁.
그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명박하고 이회창은 손가락이 부러져도 못 찍겠다는 사람들이고,
권영길은 "아직은 사표"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본질적으로 자신의 "한표"가 뭔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보인다는 푸념이다.
그들이 이른바 부동층 혹은 잠재적 기권층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다.
대선은 가까워지고 이제 이명박과 이회창 두 보수 대결 구도로 대선이 치루어지는 것을 그나마 막아내는 수는,
우왕좌왕 소시민적 감수성이 쉽게 표를 던질 선택지나 줄여주는 것일 것 같다.
그래서 정동영, 문국현의 단일화가 대선 막판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문국현의 몽니가 만만치가 않다.
오마이뉴스에 유창선이 쓴 데로 사실 게임의 법칙상 문국현이 양보하는 수순을 밟는게 이른바 정도일 텐데,
문국현지지자들이 난리가 아니다. 정치적 구도로만 보자면 지난 대선에서 정몽준 지지자들이 노무현한테 사퇴하라고 요구하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양상인데, 정몽준은 그나마 지지도라도 높았지만, 문국현은 그나마 그것도 아니다.
정동영이 문제가 많은 후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정당의 경선을 통과한 후보가 아니던가? 문국현은 그 경선에 뛰어들기를 거부하고 그러니까 정동영이 후보로 나설수 없는 상황을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꿈꿨던 사람이 아니라, 남의 가게 옆에 좌판을 벌여서 상권을 잠식해서 결국은 그 가게를 인수하겠다는 식의 전술을 쓴 것인데, 좌판 매출이 시원치 않으니 이젠 끝내는게 옳다.
솔직히 문국현은 정치적으로도 정동영과 권영길 사이의 어정쩡한 스탠스 밖에는 없는 것 아니던가?
문국현 지지자들은 정동영이 사퇴의 용단을 내리라고 아우성인데 그건 또 이회창 지지자들이 이명박 사퇴하라는 꼴과 별 다를바가 없다. 사실 문국현이 무슨 빛좋은 "개혁세력"을 대변할 내용을 가진 사람이기 보다는 "때 안 탄" 인물이란 것 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한국 대선이 정책하고는 무관하게 흐른지 오래인 상황에서 그마나도 이슈하나 못 만들어냈으면-이회창은 그것이라도 있다-좌판 쓸어 담을 적절한 방식을 찾아보는게 옳바른 처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국현은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살아 남을 가능성이 거의 전무해 보이는 상황인데, 그건 다 문국현책임이다. 이회창은 더 짧은 기간에 현역의원도 빼가는 판에 겨우 망해가는 신당에서 한명 빠져나가는 상황이라면 게임 끝났다고 봐야지 뭘 더 보고 말 것이 있는가?
정치 공학이고 뭐시고, 남은 10일 안에 천지개벽을 기대하지 않는 한, 해보나 마나한 선거를 하는 것이라면 솔직히 "열심히" 했다는 선에서 자위라도 할 자리를 만들어 내는게 정치집단의 정도에 가깝다. "패배의 감동"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본다면, 일단 문국현은 빠져줘야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문국현과 같이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문국현과 함께 패배해서 얻는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문국현에 투표하느니 권영길에 표를 던져주는게 한국 정치를 위해서 백번 옳은 일이다.
도대체 "반 정동영"이 무슨 개뿔 정치노선이란 말인가?
2007년 12월 5일 수요일
[펌] 노스캐롤라이나 근교+타주 여행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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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 및 타주 여행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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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곳에 온지 이제 2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주말에 다닌 곳을 가까운 곳 위주로 애들이 좋아하는 곳과 타 주 여행한것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도착하신지 얼마안되시는 분들은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어디 가실지 좀 답답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허접하게 정리해서 올리고 타주 여행은 전체 윤곽 참고되라고 대충 경로만 올립니다. 골프장은 제가 안해서 잘 모르고,,,, 하지만 정말 공부하기도 좋고 참 갈 곳 많은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딸애 친구네 가족들과도 주말 나들이도 하고 해서, 참 재미있는 추억이 깃든 곳이라 아마도 귀국하면 여기 추억을 드나들며 지내게 될것 같습니다. 주말과 방과 후에 여러 클래스에 데리고 다니다보면 오히려 반아이들보다 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고 playdate 등 어울릴 경우가 더 많이 생기게 됩니다. 모쪼록 시간들 내셔서 많이 여행들 하시고, 아이들에게도 시간 많이들 내셔서 여러 경험들을 시켜주셔서 값진 미국 생활이 되시길...... 아이스크림 집: 제가 채플힐 도착해서 제일 처음 간 곳입니다. 처음에는 꽃길이 얼마나 예쁘던지......나중에 보니 여기 국도 길이 다 비슷하더라구요...그래도 아이스크림 먹으러다니면서 도로에서 유유자적한 사슴가족을 3번이나 만났습니다......차 앞에서 자기들끼리 반상회하는 지 5분 정도 봤습니다. 한번은 뒤에서 따라오던 경찰과 같이 차 멈추고 구경한적도 있습니다. Mapleviewfarm, 채플힐에서 약 15-20분, 저녁에 1시간 정도 가족끼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갑니다http://www.mapleviewfarm.com/ 1. Morehead Planetarium and Science Center UNC-CH, CB #3480, Chapel Hill, NC 27599, (919) 962-1236 그냥 채플힐에 있어서 한번 들러보게 되는 곳입니다. 우주와 관련된 IMAX 영화 상영과 전시물이 있습니다. 2. Discovery Place 301 North Tryon Pl., Charlotte, (800) 935-0553 North Carolina Museum of Life and Science의 회원이면 무료입니다. 아주 좋은 시설로 볼게 많고 하루가 금방 갑니다. 바로 옆에 샬릿의 무료버스가 다니고 있어서 샬릿 구경도 같이 하시면 좋습니다. 쇼핑 좋아하시면 샬릿 도착 직전 우측에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아울렛이 있으니까 잠깐 들르셔 두 좋구요..초등학년 전부 유용. 3. Greensboro Children's Museum 220 North Church Street, Greensboro, NC 27401, (336) 574-2898 일요일에는 2불입니다. 유치원 저학년 3학년 미만 애들은 3 시간은 족히 시간때웁니다. 4. The Rocky Mount Children's Museum 1610 Gay Street, Rocky Mount, NC 27804, (919) 972-1167 새로 옮기고 레노베이션해서 깨끗합니다. 저학년 용 5. Lazy 5 Ranch 15100 Hwy 150 East Mooresville, NC 28115. (704) 663-5100 여기는 개인이 운영하는 사파리입니다. 3마일 정도를 자신의 차를 타고 가면서 혹은 따로 돈을 내고 마차에 타서 기린, 얼룩말, 타조 등 각종 동물에게 직접 먹이를 주는 곳입니다. 애들이 너무 좋아하지요. 얼룩말이 차안으로 머리를 디밉니다. 콧바람 세게 쏘면서,,,,,, 6. Natural Science Center of Greensboro 4301 Lawndale Drive, Greensboro, NC 27455, (336) 288-3769 3번 장소와 15분 거리에 있으니까 세트로 같이 다녀오셔도 좋구요…단 세트로 가시려면 일요일에는 오후에 여니까 한 군데만 갈 시간이 됩니다. 식사가 어중간하면 서울가든이라고 한국 식당/마켓이 5318 W Market Street Greensboro, NC 27409에 있으니까 식사하시고 장보고 오셔도 됩니다. 음식은 괜찮은 편이고 친절합니다. 초등생 전부 유용. 아참 여기 20007년 6월인가 부터 미니 동물원 개원했고 그런대로 볼만합니다. 시간 맞추어서 동물들 먹이도 주는데,,,호랑이 서서 먹이 받아먹는거 보시면 진짜 크네,,,소리 저절로 나옵니다. 7. North Carolina State Museum of Natural Sciences 102 North Salisbury Street, Raleigh, NC 27626, (919) 733-7450 전 개인적으로 워싱턴의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보다 여기가 더 좋았습니다. 가신 김에 의사당도 구경하시면 시간이 제법 갑니다. 초등생 전부 유용 8. Imagination Station Science Museum 224 East Nash Street,Wilson, NC 27894, Phone (252) 291-5113. 드라이브 삼아서 64번 국도 타고 가볼만 합니다. 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9. North Carolina Museum of Life and Science 433 West Murray Avenue, Durham, NC 27704, (919) 220-5429 아주 좋습니다. 전 회원인데 정말 자주 갑니다. Explore wild life를 개장해서 좀 더 넓어진 느낌입니다. Summer camp가 좋다고 합니다. 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10. SciWorks 400 West Hanes Mill Rd., Winston-Salem, (336) 767-6730 조그만 농장과 wild habitat이 박물관에 같이 딸려있고 재미있습니다. 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11. Exploris 201 E. Hargett St., Raleigh, (919) 834-4040, 아주 교육적인 어린이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번 회원이면 작년 10월부터 ASTC가 해당되어서 공짜입니다. 회원증 내면 밑에서 일하는 일반직원은 잘모르고 매니저 비슷한 좀 높은 사람이 confirm해줍니다. 근데 exploris member는 9번에서 공짜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네요...고참...유치원 3학년 이하 초등생 12. North Carolina Zoo 4401 Zoo Parkway • Asheboro, North Carolina 27205 여기 계시면 한번은 가시게 되겠지요. 요즘 동물들이 많이 활발해져서 좋습니다. 날씨 좋을때 가족 나들이 하시면 좋습니다. 도시락 싸가도 됩니다,. 원래 안된다고 하는데 검사 안합니다. 카페가 입구 중간 해서 3개가 있습니다. 음식은 핫도그 햄버거 샐러드 등이 있습니다. 13. NC transportation museum 411 South Salisbury Avenue, Spencer, N.C. 28159 5번 장소에서 20분 거리니까 같이 다녀오실 만 합니다. 기차는 모두 다 있습니다. Salisbury trolley 타셔서 타운 구경도 하시구요. 유치원 4학년 이하 초등생 14. Old Salem http://www.oldsalem.org/ 가족 나들이 적합합니다. 마차 타시고 기분도 내시면 운치있습니다. 15. Sarah P. Duke Gardens and Duke Chapel http://www.hr.duke.edu/dukegardens/dukegardens.html 뭐 듀크 계신 분들은 점심 드시고 산책하는 곳이지만 주말에는 가족들이 나와서 피크닉하기에 딱입니다. 안쪽 주차장에 주차하시면 무료고 입구 쪽은 돈 냅니다. 채플이랑 같이 한 바퀴 도시면서 가족이랑 듀크의 아름다운 교정을 감상하기에 딱입니다 16. NC aquarium http://www.ncaquariums.com/ wilmington에 있고 아기자기합니다. 가셔서 게도 잡고 바다 구경하시면 좋습니다. 초등생 전부 유용 17. Chapel hill-Kidzu museum http://www.kidzuchildrensmuseum.org/ 개장한지 얼마 안되었고 프랭클린 사거리에 있습니다. 유치원생/1학년 초등생 등 작은 어린이들이 가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6세 이하 18. Metrolina Wildlife Park 4400 Cook Rd. Rockwell NC 28138, Phone: (704) 279-6363 개인 동물원이고 나름대로 특색이 있습니다. 먹이 줄 수 있습니다. petting zone있구요. 19. Biltmore Estate http://www.biltmore.com/ 유명한 곳이구요….저는 개인적으로는 별루…유럽에서 보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 하도 유명한 집이나 궁전이 없다보니…그래도 남들 다 가는 곳입니다. 20. Chimney rock http://www.chimneyrockpark.com/ 가볼 만 합니다. 주로 스모키나 빌트모어 갔다오다가 들립니다 21. Grand Father Mountain http://www.grandfather.com/ 여긴 저도 아직 안가봤는데 natural center도 있고 볼만할 것 같습니다 22. Luray cavern (Shenandoah Valley) http://www.luraycaverns.com/ 역시 유명한 곳이구요. 윌리엄스버그 갈때 혹은 단독 코스 1박해서 아니면 새벽에 일찍 잠깬날 가족다 깨워서 무리해서 당일 다녀오실 만한 거리입니다. 23. Lost Sea http://www.thelostsea.com/home.htm 스모키 갔다가 들리게 되는 곳입니다. 동굴에 큰 호수가 있어서 배를 타고 보는 데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24. Great smoky mountain http://www.nps.gov/grsm/gsmsite/home/ 역시 유명한 곳이구요. 지인들하고 케빈빌려서 가면 재미있습니다 25. Williamsburg-James town settlement-Yorktown http://www.visitwilliamsburg.com/ 역시 유명한 곳이구요. 가시면 hampton inn and suite에 묵으시면 후회 안 합니다. wet bar있고 거실이 따로 입니다. 비싸지도 않고...저녁에 도착하시면 호텔에서 자동차로 3분거리에 스미스필드에 있는 것 본다 엄청 큰 아울렛이 있으니까 쇼핑도 하시면 좋죠… 26. Virginia beach http://www.vabeach.com/ 시원합니다…큰 다리 구경도 하고 27. Virginia Science center http://www.smv.org/ 더램에 있는 뮤지엄보다 규모가 큽니다. 25번 가면서 잠시 들렀었습니다 28. playspace http://www.playspacemuseum.com/aboutus.html 7세 까지 재미있게 교육적으로 놀수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이쁘게 꾸며놓았습니다. 5불입니다. 근처에 7번과 11번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여러군데를 같이 볼수 있습니다. 유치원 1학년 이하 초등생. 29. Frank's Fun Park http://www.frankiesfunpark.com/raleigh/attractions/ 우리나라의 오락실과 같은 개념인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spider house/fun house/semi-drop shot등이 있고 처음에 가서 fun card를 machine에서 만들어서 충전하면서 씁니다. 대략 한번 카드 그을때마다 25-50센트가 나가고 티켓이 나오면 그걸 모았다가 점수에 맞는 상품을 타게됩니다. 근데 재미있는건 한번 씩 티켓이 안나올때가 있는데 직원 불러서 얘기하면 다시 작동해는데 이때 티켓이 많으면 한 300-400장 그냥 하염없이 나옵니다. 제 딸이 받아야 할것은 10장 정도인데...돈으로 따지면 한 30불을 잘 써야 되는 분량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전 망설이는데 딸이 냅다 직원한테 가서 뭐라고 얘기하더니 돌아와서 전부 가져도 된다고 했다고 하면서 전부 챙겼습니다...집에 돌아 갈때 딸은 당연히 커다란 인형을 자랑스럽게 챙겼고,,,,,,, 전 흐...흐..... 30. myrtle beach 한번은 가시게 되는 유명한 곳이지요. 그냥 물놀이 하러 갔었습니다. 31. 인터넷 뒤지면 horseback riding등 애들하고 같이 놀때가 제법 됩니다. 근처 공원도 아기자기하게 예쁜 곳이 많구요...9월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raleigh의 fair ground에서 하는 festival도 미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사람들이 이렇게 노는구나 아...얼마나 심심했으면...하는 생각이 듭니다....가 보시면 처음엔 색다릅니다.. 주말 마다 다른 이벤트들이 있으니까 웹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http://www.southernhighlands.org/에 가시면 여기 근처에서 must-see해야 하는 중요한 관광지 정보가 있습니다. http://www.southfest.com/northcarolina.shtml에 가시면 축제 관련 정보가 많이 있습니다. 한곳 한곳 다니시면 그런대로 재미가 있습니다. 타 주 여행 1. 나이아가라 폭포-천섬-토론토-몬트리올-퀘벡 2006년 5월 유명한 곳이라서 더 이상 설명은.... 나이아가라의 경우 1박2일로해서 근처를 보고 천섬은 토론토로 가면서 킹스톤에서 짧은 유람선을 이용하여 보았는데, 이 보다는 근처의 sky deck에 올라서 보는 경치가 더 좋았습니다. 한눈에 천섬이 광경을 볼수 있습니다. 토론토는 4박5일로 학회 참석 겸해서 city pass를 구입하여 관광지를 보았는데 grayline bus tour를 이용하여 볼 수도 잇습니다. 올드 몬트리올의 경우 http://www.tourisme-montreal.org/B2C/07/attraction_list.asp에서 골라서 보시면 됩니다. 여긴 2박 3일. 퀘벡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았던 곳인데 2번 째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때는 아쉬웠습니다. http://www.quebecregion.com/e/에서 가고 싶은 곳 고르시면 됩니다. 2박3일. 2. Orlando and Boca Raton 모두 다 가시는 곳이니까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전 학회 때문에 3번을 다녀왔는데, http://www.quebecregion.com/e/에서 타운 홈 빌려서 묵었습니다. 디즈니 말고도 주경계에 있는 welcome center에 들리시면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사파리도 있고, Wannado city (http://www.wannadocity.com/index.php)라는 특이한 amusement park도 있는데 제 딸애는 지금도 한번 더 가자고 조르고 있습니다. 3. Everglade national park 꼭 가보시 길 권합니다. 자연그대로의 wildlife를 볼 수 있어서 꼬마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근처의 Fort Lauderdale에도 볼 거리가 많습니다. 4. Miami, Tampa and St Petersburg 마이애미는 그냥 도시였고 개인적인 느낌은 별로 였습니다. 근처 수족관과 이를 겸한 놀이 공원에서 근사한 쇼를 하는 곳이 유명합니다. key west인가요? 여기 가다가 들리시면..나머지 두 곳은 한적하니 여행하는 맛이 납니다. 5. Kennedy center 올란도 가는 길에 들러서 구경했는데 무지 크긴 합니다. 남자애들이 좋아 할 듯.. 6. St. Augustin 올란도 가기 전에 들렀는데,,스페인 풍으로 괜찮습니다. http://www.oldcity.com/에서 정보 구하시면 되고 2박 3일이면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7.Savanah SC Charlston가면서 들렀던 중간 지점입니다. 약간 퇴폐적인 느낌이드는 old city이고 1박 2일로 riverfront만 들렀었습니다. Elm tree들이 인상적입니다. 8. Charlston 2번 들렀었는데,,너무 유명한 곳이지요..한적한 church st를 여유롭게 걸으셔도 좋고 여유로운 riverfront park에 주차하시고 걸어서 historic district를 죽 둘러보시면서 이전 남부 시대의 유명한 저택들을 눈에 담으시면 평생 추억으로 괜찮을만한 도시입니다. 9. Atlanta 심심할 때 그냥 2박 3일로 주말 여행했었습니다. stone mountain, coca cola museum (입장료 비싸고 볼건 없습니다만 콜라같은 청량음료는 무료입니다. 전 museum of life and science회원이라서 공짜로 보았습니다.), underground atlanta등이 그래도 가 볼만합니다. 10. Chatanooga 시간이 되시면 스모키 마운틴 가시면서 묶어서 가시면 three birds with a stone입니다. 볼거리가 많고 가족여행으로 적합니다. 전 Columbia-Charlston-Chatanooga로 5뱍 6일간 여행했었습니다. http://www.chattanooga.gov/ 11. 루이지아나 뉴올리언즈도 시간이 되시면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마디그라 축제 기간이에느 ㄴ방접기가 어렵고 비싸서 그렇지만 일년내 축제의 맛을 볼 수 있는 프렌치 쿼터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swamp tour를 하면 루이지아나의 특이한 지형에 대한 ecologicla aspect도 특이한 경험이 됩니다. 여기에 auboburn zoo라고 있는데 아주 근사하고 특이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http://www.neworleansonline.com/ 12. Montgomery 뉴올리언즈 가면서 들린곳 입니다. 한국 식당도 몇군데 있고 현대자동차 공자도 가다보면 멀리서 보이는데 기분이 묘합니다. old montgomery가 그냥 볼만합니다. 13. 볼티모어 학회 참석 차 들린 고인데,,port discovery에 가시면 아이들과 2일 정도는 재미있게 보내실 수 있습니다. 14. 와싱턴-루레이동굴-뉴욕 다 가시는 루트이지요. 15. Alexandria 14번 다녀오면서 들린곳인데, 와싱턴 기념관이 볼만합니다. 16. Richimond 연휴 때 VA에 시간이 나서 들렀는데 크게 볼만한것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좀 식상하게 느낄만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17. 서부 여행 여긴 너무 넓어서 4번 정도는 가야지 수박 겉핥기로 볼 수 있는 곳 같습니다. 전 학회 참석으로 1번 개인적으로 1번 해서 2번을 다녀왔는데, siera nevada 를 경계로 해서 구경을 각 8박 9일 정도로 나누어서 했었습니다. 제가 자동차로 간 여정입니다. 1) Las Vegas (Death valley/old Nevada/valley of fire/hoover dam)-Mt Carmel Jct (Zion/Bryce canyon National Park)-Page (Horse shoe/Marble canyon/Glen canyon dam/Lake Powel)-Flagstaff and sedona (Grand Canyon/Meteor crater/Sunset Crater Volcano/Wuptaki natl monument/Walnut canyon/Red rock/Airport Mesa/Bell rock/)Holy Cross Chapel-Phoenix 9downtown) 2)San Diego (old San Diego/Hotel del Coronado/Seaport Village/zoo and sea world)-Palm Desert (The living desert zoo and gardens)-Solvang (덴마크 마을/Santa Ynez valley)-Santa Barbara County courthouse-Pismo beach (Hearst castle/Moro rock/Piedras Blancas Elephant Seals)-Yossemite park-San Francisco 18. 시카고 여긴 박물관과 시 공원이 아주 볼만합니다. 질리게 할 정도의 무지무지 큰 박물관들이 여행자를 맞이 합니다. city pass 끊어서 돌아다니면 50% 정도 할인이 됩니다. http://egov.cityofchicago.org/city/webportal/home.do 19. Kentucky Horse Park http://www.kyhorsepark.com/ 아주 멋지고 각종 마장마술쇼는 다 볼수 있습니다. 진기한 혈통 좋은 말들은 다 볼 수 있습니다. 1억 2억,,,모두 억억 하는 말들 입니다. 20. Cancun, Mexico expedia로 예약하여 다녀왔고 애들은 꼭 돌고래와 함께 수영 해야 합니다. |
2007년 11월 26일 월요일
오마이 뉴스 홈페이지의 짜증스러움.
요즘들어 사이트에 들어갈 때마다 짜증스러움이 배가 되는 느낌이다.
문국현 띄우기야 오마이뉴스의 "배팅"과 문국현 지지자들의 "작전"의 결과이겠지만,
내가 가장 짜증스러워 하는 부분은 정작 오마이 뉴스 상단 왼쪽 편에서 자동으로 플레이되는 오마이 티비 생중계 섹션이다.
무엇보다 오마이뉴스의 인터넷 티비 "강제 송출" 행위는 인터넷 속도가 떨어지는 지역에서-나처럼 해외에서- 접속하는 경우에 엄청난 랙을 불러일으킨다. 사이트가 열리는 시간 부터 시작해서 정작 인터넷 방송 그 자체도 잦은 끊김 때문에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게다가 하나의 기사를 읽고 다시 초기 화면으로 옮겨왔을 때 다시 재 로딩을 하면서 발생하는 "소음"도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웹 페이지는 일부 개인 블로그나 포스팅에서 강제적으로 배경음악이나 플래쉬등을 삽입하는 데서도 느껴지는 짜증스러움인데, 하물며 언론사 홈페이지이니 그 짜증이 배가 된다.
상당수 인터넷 이용자들이 차츰 구글로 옮겨가는 이유는 구글이 적어도 사용자들의 자기 선택권을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음 소거를 누르면 될 일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 보다 먼저 접속자가 스스로 "텔레비젼" 시청권을 선택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닐까? 아무 맥락없는 방송을 띄엄띄엄 화면에서 봐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문국현에 관한 독자 리플이 항상 우측 최상단에 올라오는, 그것도 "잠실 박철훈"인가 하는 사람의 글만 주구장창 올라오는 것도 눈에 거슬리기는 마찬가지다.
오마이뉴스가 초기의 신선한 시도와 대중적 호흡을 방기한다면, 인터넷 미디어의 특성상 한순간에 정기적 방문자층을 잃어 갈지도 모를 일이다.
2007년 11월 20일 화요일
도박사 노무현의 "낙장" 퍼레이드. 구시대의 막내 놀음.
민주당과 정동영과 못 해먹겠다는 말인 줄은 알겠는데, 삐짐과 찌질함의 극강모드를 보여줘도 분수가 있는 것 아닐까? 뭐 개인적 호불호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일상적인 "귀차니즘"의 논리일 뿐, 사실 이 "호불호"야 말로 정치적 표현 아니던가? 하여 "너랑은 못 해 먹겠다"는 매우 극단적인 정치적 표현으로써 분석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의 정치를 일반적으로 승부사의 정치라고들 하는데 문제는 그가 주성치 같은 "도성"들이 한다는 "차패"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판돈 밀어넣고 "콜"을 부르는 "못 먹어도 쓰리 고" 타입의 정치에, "열 고" 행진이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무지 짜증나게 된다는데 있다. 이건 이기는 쪽이건, 번번히 밑천 떨어져가는 쪽에 붙어있는 사람들이건 모두에게 "게임"자체가 진저리가 나게 하는 "깽판"에 가깝다.
개혁피로도를 이야기하는데 사실 정치 행태로써 노무현의 정치는 "개혁"이란 게임을 매우 재미없게 만들어버린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 선수 잘 못 내세운 꼴인데, 인간 그런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전국민이 "대체로" 간과했었으니 모두의 책임이다.
그나저나 저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노무현의 어설픈 배짱은 정작 자기가 "선잡고 패 돌리는" 순간에 드러나는 것 같은데, 호남에 정치적 경쟁관계를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한국정치가 호남인들의 극단적 "반한나라 정서" 때문에 발전을 못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민주당 "유지"들의 "텃밭"농사가 정치적 생산력을 떨어뜨린 것이 문제라는 것인가? 후자는 그럴싸한 논리이지만, 그렇다고 열린우리당이 할일이 아니다. 그것은 민노당이나 다른 정치세력이 차차 해나갈 몫인 셈이다. 그럴싸한 민주당 비판 뒤에 숨어 있는 논리는 이른바 "민주화 정통세력"으로써 호남 정치인들이 챙기고 있는 그 상징성이 영남출신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그에게 몹시 못 마땅한 것 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상 살다가 별 어이없는 정치 논리를 다 본다는 느낌이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읽어준다 해도, 그의 논리는 순진하게도 호남의 변화를 통해 전국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인데, 아쉽게도 호남은 광주민중항쟁때 고립되었던 경험에서 별로 진전된 정치적 위치를 한국 정치구조에서 점하고 있는 곳이 아니다.
냉정하게 보면 "전라도 깽깽이들이 그러던지 말던지"가 유일하게 전국적으로 문제되는 상황은 사실 한국사회에서는 선거 밖에는 없었다. 하여 지금까지 대선에서 확인한 바, 90%에 육박하는 절대적 지지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구조에서 전라도를 무장해제 시키려고 한다는데 무슨 수로 누가 선뜻 동의하겠나? 전라도에서 나타나는 극도의 정치적 피해 강박증을 해소하는 일은 정치구조 일반의 이완밖에는 길이 없는데, 노무현은 전라도를 한국사회 정치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병적 징후"로 대상화하는데 동의함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 버렸다. 현실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이라고 정치적 강박증을 견디며 살고 싶겠나? 민주주의 ABC의 기본 아닌가? 사실 전라도 정치판만 가지고 본다면 노무현은 전라도 정치의 가능성을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통해 다시 한번 거세해버리는데 앞장 선 혐의가 있다. 노무현을 당선시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이란 무거운 짐을 벗고 미래를 향한, 다양한 정치 노선으로 충분이 분화될 여지가 있었는데, 그 판을 노무현의 어설픈 "구시대 막내" 투정놀음이 휘젓어 버린 셈인 것이다.
결국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노무현은 전라도를 별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전라도의 "민심"은 자기가 가진 최대 밑천이었지만, 그것이 자기것이 아니라고 "못믿어워" 했기에, 쥐고 있자니 불안하고, 내놓자니 아까운 패였고, 그러다 어쩌다 "낙장"의 실수만 계속 범해온 것이 노무현 정치의 그간 궤적이다.
그나저나 무슨 "쌈마이"도 아니고, 정치판에서 "의리"찾는 강아지 풀 뜯어 먹는 논리는 왜 그리 반복해 대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무슨 "의리" 정치인가? 개개인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 기본 아닌가?
이런 인식으로 민주주의 교과서까지 쓰시겠다는 포부는 어디서 가지게 되었는지 그 배짱은 일단 존중할만 하다.
구시대의 막내라 스스로를 칭하던데, 천방지축 막내가 칭얼대는 꼴에 지쳐왔던 것이 우리 국민임을 알기나 하는지..
전 국민에게 정치 지도자 선택에 대한 집단적 환멸을 만들어낸 이 교과서 같은 양반에게,
국민들은 지금 전과 14범도 당신보단 나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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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olinews.co.kr/news/newsview.html?pkey=10107&no=78907&PHPSESSID=27c1aa45e645e118e000eb34613aa6fb
| 盧, “이당 저당 보따리 싸는 정치인은 비난받아야” | |||
| '통합민주당' 합당 부정적 입장…“호남 정치인과 못해먹겠다” | |||
지난 11일 < K-TV >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이는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 합당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의 기본적 입장은 호남에서 여러 정당이 경쟁을 펼치면서 서로 상충 발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열린우리당 창당을 했었는데 도로 민주당으로 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입장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번 합당이 두 당의 몇몇 지도자가 모여 밀실합당이기에 노 대통령으로서는 더욱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일단 청와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합당에 유보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청와대 내부도 합당에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해 있다. 노무현, 호남에서 경쟁시스템 만들어야…호남 정치인과 못해먹겠다 그 이유는 열린우리당 창당 정신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정신은 노 대통령의 의중이 어느 정도 들어갔지만 이번 합당은 노 대통령의 의중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창당을 호남에서 경쟁하기 위해 했다고 토로했다. 지난 8일 오후 전남 나주 중흥리조트에서 열린 ‘광주·전남지역 주요 인사 오찬간담회’에서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응원했던 것은 호남 안에서도 정당간 경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정당 간에 경쟁이 없는 정치는 정치품질 저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며 “정치적·정책적으로 의미있는 경쟁을 하고 필요하면 제휴와 연대를 하면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지역만을 근거로 해서 단결하게 되면 반드시 반작용을 부르게 되고 영원히 큰 판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정치도 경쟁을 해야 경쟁력 있는 국회의원이 나오는데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면 되겠느냐…영남에서 호남색 선출직이 당선되고 호남에서 영남색 선출직이 당선되는 상호 경쟁시스템이 만들어져야 정치도 발전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대통합민주신당의 출현은 이 같은 취지에서 크게 벗어난 것으로 지금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작심이라도 한 듯 “화를 참지 못해서 그러는데 전라도 정치인들하고 일을 못해먹겠다”고 주장하면서 ‘머리가 없는’ 혹은 ‘머리가 나쁜’이라는 말까지 여과없이 표현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보면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즉, 열린우리당 출현은 호남에서 민주당과 경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은 민주당과 합당함으로써 호남정당이 출현한 것이다.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창당한 이유 즉 열린우리당 창당 정신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번 합당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 보따리 싸들고 이당 저당 으로 돌아다니면 공격해야 한다 노 대통령의 의중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것은 지난 11일 < K-TV >와의 인터뷰다. 노 대통령은 “정치인들이 보따리 싸들고 이당 저당으로 돌아다니는 문제에 대해 아주 제가 신경질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보수 진보 이전의 문제다”며 “심지어는 민주주의 이전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치인이 거짓말 했을 때 국민들은 ‘아니, 정치지도자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흥분을 해야 하고, 정치인이 원칙을 저버렸을 때 ‘어떻게 정치지도자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화를 내야 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인들이 말 바꿨다고 화내는 사람 있느냐.당 바꿨다고 화내는 사람 있느냐.언론이 말하고 있느냐"며 "구경만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노 대통령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원칙을 아는 정치인이냐하는 점이며 원칙이 있는 사람이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냐, 이것이 기본 요건”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이당 저당 보따리 싸고 옮기는 그런 행태는 비판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합당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청와대, 공식적으로 입장 유보…내부적으로 합당에 대해서는 부정적 이는 청와대도 마찬가지. 천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통합신당과 민주당이 상당히 급작스레 합당과 후보 단일화 원칙에 합의했을 뿐, 어떤 정당을 지향하는지 어떤 절차를 거칠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면서 “청와대는 그런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는 합당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천 대변인은 “지금 이 시점에서 청와대가 (합당에 대해) 발언하는 게 적절치 않다는 상황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청와대 내부에서는 합당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해체에 반대했었고, 지역주의 회귀에 대해 우려도 거듭 표명했었다”고 말해 합당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음을 밝혔다. 이어 ”노 대통령이 통합신당 당원이 아니기 때문에 합당 문제에 침묵하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정치는 원칙과 명분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으로 국민 평가를 받는 게 정도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즉, 이번 합당은 노 대통령이 갖고 있는 원칙과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기사입력시간: 2007-11-13/11:21:27 |
2007년 11월 18일 일요일
[펌] U600 핸드폰 자바프로그램 설치
| U600/U608 유저님들 게임 넣는 방법! | | | Miniskirt 해외유저 |
| 2007.08.08 15:26 |
| minyeppy | 일반멤 |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길레..
간단한 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인터넷에서 게임을 다운 받을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게임 화일은 확장자가 Jar 로 되어있는것을 찾으면 됩니다.
꽤 찾기 쉬워요. Google가시면 심심치 않게 구할수 있습니다.
화면 사이즈가 240*320 이어야 하겠죠. U600 이라면.
단 한국싸이트에서 다운받은 Jar 는 안되더군요. 한국게임을 했으면 좋으련만.
아무튼, 확장자가 Jar 와 Jad 가 있다면 두개다 받으셔야 하구요.
만약 Jar 밖에 있지 않다면, Jad 생성기라는 프로그램을 따로 다운을 받으셔서 (이것도 Google 에서 쉽게)
Jad 화일을 만듭니다. (생성기 돌리면 같은 이름으로 확장자만 Jad 로 바뀐 화일이 생깁니다.)
예) poker.jar, 그리고 poker.jad
이렇게 두 파일을 만드신후에 핸펀에 다른 파일 폴더로 옮깁니다. (usb 케이블로)
* 다른 파일 폴더로 밖에 옮길수 없어요.. PC Studio 로 옮기실땐..
두 파일이 다 옮겨지고 나선 핸펀에 이렇게 입력하세요
*#9998*4678255#그러면 설정되었습니다 라는 메세지 혹은, 어쩌구 Enabled 라는 메세지가 뜰거에요.
그후에 핸펀으로 다른 파일 폴더를 가서 Jad 확장자를 가지고 있는 화일에 가서 옵션을 누릅니다.
그리고 설치를 누르셔서 설치 하시면 자바세상에 게임이 설치가 됩니다.
설치하신후에 다른파일 폴더에 있는 두가지 화일은 지우셔도 게임은 할수 있습니다.
모든 게임을 설치 하셨다면, 다시 위에 코드를 입력하세요.
글머 해제되었습니다 라는 메세지 혹은 어쩌구 Disabled 라는 메세지가 뜰겁니다.
그리고는 짜잔~ 게임을 즐기시면 됩니다.
허접한 설명이었지만, 아무조록 성공하시길 바라며,
즐겜 하세요~
- 참고로 게임이 설치가 안되거나 오류가 발생하거나 설치가 된후에도 게임이 안된다면, 그 게임은 U600/U608에서
할수 없는 게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땐 포기하세요. ㅜㅜ
2007년 11월 17일 토요일
말보로 버지니아 블랜드 (Marlboro Virginia Blend)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사는 노쓰캐롤라이나는 "American Tabacco" 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도시답게,
저렴한 담배가격으로 내 흡연욕구에 별다른 자본주의적 훈육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미국에 온 한 동안, Marlboro Ultra Light 을 피우다가, Sams Club 회원이 되고서 부터서는 미국 백인 여피들의 흡연 취향에 따라, American Spirit 을 즐겨피워왔는데, 이게 일단 한값당 3달러가 넘는 "럭셔리" 담배인 고로, 재정적인 압박이 누적되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한국식 흡연습관인 "줄담배"에는 이 담배의 높은 니코틴, 타르 함유량이 불러일으키는 심폐 압박이 가끔 고통스럽거나 때론 "죽음의 기운"을 느낄만큼 스산한 것이어서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던 차에, 눈에 들어 온 신상품 담배가 바로 말로보의 신작 버지니아 블랜드이다.

지난 여름 베트남의 한 카페에서 던힐의 버지니아 블랜드 담배를 "도우미"언니의 호리호리한 접근에 꼴딱 넘어가 피어본 적은 있었는데, 가격도 가격이러니아 던힐 특유의 "중량감"이 심폐압박을 해와서 특별히 내 선호도를 바꿀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말보로 버지니아 블랜드는 첫 담배를 피어본 순간, "와~우!" 목넘김, 맛 모든 것이 너무나 부드러운 것 아닌가? 그리고 내가 말보로를 싫어했던 최대의 이유중의 하나였던 이른바 "담배찐" 냄새가 말끔이 사라졌다. 말그대로 프리미엄급 담배로서 손색이 없는 맛과 향이다.
여러 미국 애연가들의 평가대로 400년 전통의 버지니아 담배 잎의 맛과 향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확인을 하는 순간이었다. "서민들의 벗"이었던 말보로가 이제 "고급담배"로써 브랜드 밸류를 고양하는 순간이랄까?
앞으로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전통에 기대었던 아메리칸 스피릿에서 미국 이민자들의 "공장제 수공업적" 담배농사가 만들어낸 저 말보로 버지니아 블랜드로 바꿔피워야 겠다. 게다가 가격도 무려 40센트나 저렴하니 말이다.
싱글블랜드. 여러가지 퓨전, 믹스, 하이브리드가 판치는 세상에서 맛의 독특함도 다시 원료의 싱귤래리티로 돌아가는 것 같다.

2007년 11월 13일 화요일
타임즈의 세계 대학 랭킹 발표
한국의 과기대가 미국출신 총장을 영입하고 테뉴어 심사에서 교수들을 대거 탈락시켰던 것은 "철밥통"을 깨뜨린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례로 들었던 이른바 하버드의 낮은 테뉴어 통과율은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유명 대학들은 이미 "검증된" 학자들을 독식하고 (서울소재 한국 대학들도 마찬가지고), 대다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체제로 움직이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세계 랭킹에 오르는 미국 대학교육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해야 옳았다. 테뉴어를 받는데만 혈안이 된 교수들이 강의에 신경을 안쓰고 외부강연, 자기 논문준비에만 혈안이 되어있고, 그에따라 미국의 사립대학 학생들은 갈수록 낮아져가는 강의의 질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학비에 오직 "랭킹"만 부여잡고 지내고 있는 것이 최근의 상황이다. 갈수록 졸업동문들 그리고 부잣집 학생들의 부모들의 관심을 사는데 혈안이 되고 있는 미국 대학들은 바로 이 랭킹을 올려줄 실질적인 힘이 "학연"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고등교육의 질은 단순히 한교수가 몇편의 연구논문을 양산해 내는가던가, 한편의 연구결과가 얼마나 인용되는지 하는 문제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수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던가?
물론 분명한 것은 상위권을 이루고 있는 대학들의 도서관이나 여러 교육환경들이 다른 곳들보다 분명 나은 것은 사실이고 랭킹이 높은 곳에 몰려드는 기부금, 발전기금의 흐름을 어찌하긴 어렵지만, 고등교육을 대학의 기업화를 통해 해소하겠다는 서구적인(정확히는 미국적인) 사고자체는 분명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이다.
심지어 이 "랭킹"이라는 것이 발표되는 시기가 대개 서구의 신입생 입학지원시기와 맞물려 있고, 순위를 제외한 자세한 정보는 묻히는 상황에서 피상적으로 제공되는 이런 행위는, "블루칩"에 일단 투자하겠다는식의 교육시장의 주식시장화와 맞물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다시 돌아가면 랑시에르가 미테랑정부의 교육개혁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지성"의 해방이란 문제를 제기한 것 처럼, 한국 대학이 혹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이 몇위인가가 중요하기 보다는 어떻게 "지성"의 전당으로써 대학의 자리를 다시 확보 할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출처 "The Chronicle" Duke University
2007년 11월 11일 일요일
교과서적 "교양주의"?
개인 홈페이지를 돌아다녀보거나 커피마시며 대화를 하다보면,
그들의 관심사들 그러니까 주로 음악과 미술 그리고 오묘하게도 음식에 관한 취향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들이 대단히 교과서 적으로 클래식하고 "교양적" 취향이어서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나는 한동안 내가 기본적으로 "잡놈"에 가까워서 그런 교양 넘치는 취향들과 "와꾸"가 안맞다고 생각을 하고 했었다.
물론 내가 "반"교양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배운 행세"는 해야하기도 해서,
대놓고 무식한 티를 내지는 않는데, 그래도 얼마간 거리감 혹은 괴리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내가 "시껍하게" 타인의 교양 넘치는 취향들에 반응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가지지 못하는 어떤 경지에 이른 체화된 삶의 교양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위에 사용했던 따옴표는 다시 붙여져야 할 것인데, "교양적"에 붙기 보다는 "교과서적"에 붙어야 올바를 것 같다. 내가 그들의 취향에 닭살스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의 한결같은 교양노선, 그러니까 교과서적 취향에 있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어떻게 음악은 다들 한결 같이 클래식 음반만 듣는 것이며,
미술은 어째 한결같이 달리, 피카소, 고흐 그리고 뭉크를 한장 쯤 퍼담아 놓는 것일까?
어떻게 또 한결 같이 그들은 인도, 타이, 이탈리안 음식점에서 와인 한잔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일까?
말로는 "하위문화"에 대한 지적 접근을 수행한다면서, 정작 그들만의 교과서적 "고급 문화" 레이블은
천편일률적이다.
놀라운 "향유의 연대"가 이 배울만큼 배운자들에게 있는 셈인데, 결국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가 문제란 말인가?
거 참말로, 취향들 하고는...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Jazz Performance in Chapel Hill

좀 된 사진 하나. 어느날 저녁 스페인에서 온 착한 처자 크리스티나와 페루에서 온 열정녀 로시오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크리스티나의 Prelim 통과를 기념하기 위해 한잔 하자는 것. 사실 미국에 온 이후 주중에 그것도 밖에 나가 술마실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혼쾌히 응했다.
장소는 UNC가 있는 채플힐의 터키쉬 레스토랑 Tallulah. 전에도 몇번 온 적은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는 크리스티나가 스페인어를 가르쳐주고 있는 음악강사와 그 학생들의 공연이 있는 날이란다.
밤 10시가 넘어 시작하는 공연이 인상 깊었다.
터키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인도음식과 더불어 묘한 거부감이 있다), 그 곳의 맥주나 칵테일 가격은 한국보다 훨씬 싸다.
공연 중 유독 저 흑인 청년의 모습이 인상 깊어 사진을 찍었는데, 역시 삼각대가 없으니 ISO 800 으로 찍었는데도 노이즈가 심해 화질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지울까 하던 중에, 우연히 한국의 "디지탈 카메라 장비동호회" 웹사이트에서 본 루시스 아트필터를 한번 적용해 봤다.
이런게 리터칭의 미학인가? 아주 볼만한 사진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음지에서 열쇠 찾느라 몹시 힘들었다.
이젠 역시나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려던 차에, 우연히 찾아낸 열쇠를 열어보고 스스로 몹시 뿌듯해 했다.
역시, "궁한자 구하라!" 그러나 "몸 조심하라!" ^^
버마 혹은 미얀마 사태 항의 시위 at DUKE

다음날 소리 소문 없이 빨간 천은 사라졌지만, 전세계 민중의 지구적 투쟁은 여전히 어디서건 계속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버마민중의 투쟁을 광주민중 항쟁과 비교하는 몇몇 기사를 읽은 후에도, 왠지 모를 거리감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아웅산 수지에 대한 내 스스로의 의구심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데다가, "민주화"가 "친시장 친미화"로 줄 곧 번역되는 동,남아시아 민주화운동 (네팔이나 인도등지의 마오주의자 투쟁등을 제외하곤)에 대해 느끼는 어떤 딜레마 때문인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과거 "김대중"이나 "아키노"도 이런 식으로 독해가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인류학적으로도 버마인이 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버마에 거주하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생각한다면, 미얀마라는 국호 변경이 가지는 의미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도 같다. 마치 전두환의 "정의사회구현"이나 "과외금지"라던지 "고교평준화"정책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 처럼 말이다.
또 상대적으로 미 국방성이던 일부 전지구적 버마 민주화 운동 단체이건 구분없이 아이러니하게 동시에 고집하는 "버마"라는 호칭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일까하고 생각을 해보면 고개가 조금 갸우뚱 해진다. 한반도를 통틀어 "조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만들어내는 비판기능과 정치적 함의의 딜레마가 겹쳐진달까?
물론 이 모든 것들이, "현실적 고통"과 "고뇌"에서 이탈한 학적 딜레마일 수도 있겠지만, 원거리에서 문제를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조금 더 진지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정작 "무엇"이 운동의 조건이 되고 있으며, 그 속에 얼마나 다양한 "복수적 투쟁"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단순히 "민주화"라는 담론 하에서 어떤 운동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갖는 위험성은 한국의 민중투쟁에서도 드러나는 사실 아니겠는가? 모든 투쟁을 동질화 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보수적이건 진보적 외피를 입고 있던 정치적 전유의 한방식일 뿐이란 생각도 든다.
어제 신문에서 미얀마(버마)의 통행금지가 풀렸고, 그것이 실질적인 투쟁의 종료(진압 성공)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도하는 기사를 보았다. 한편, CCTV 9 에서 생중계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보고 기자회견에서는 노르웨이 기자가 버마사태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한 국제적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고, 내년 올림픽을 보이콧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질문인지 협박인지 모를 질문을 했다. 여전히 상황의 복잡성을 단순화를 통해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런데 한국이 88올림픽 할때 외신들의 "개최지 변경"이라는 논리는 오히려 국내에서 성장하고 있던 학생운동 ,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논리로 전도되었던 역사도 있는데...
첨언: 저 "빨간 천"은 뭐라고 부르는 것 일까? 미얀마(버마)에 이리 무지해서야.
내 주저함은 어찌보면 당연할 듯.
(핸드폰 U-600 촬영)
2007년 9월 6일 목요일
난독증을 앓는 이의 자기분석
제법 읽기가 잘 되는 날이 있는 듯 싶다가도, 어느새 증상이 스믈스믈 기어나오게 되고, 그런 날 들이 지속될 수록 모든 글들에 대한 저항감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그 증세는 이를 테면 다음과 같다.
책의 나머지 페이지를 읽은 페이지와 두께를 비교해 본다거나, 책의 무게를 달아본다거나, 사진과 도표와 행간의 간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출판공들의 작업을 독자가 하게 될 때, 일단 의심해 보아야한다.
그 다음은 눈과 머리가 멀티테스킹을 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데, 종종 손도 기계적인 침바름과 종이 넘김을 해대는 그러니까 신체 각 기관의 분절화가 동일한 작업내에서 극대화 되는 양상을 보인다.
증세가 아주 최악의 단계로 이행할 때는, 분절화를 통한 재 통합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인데,
속칭 매직아이 효과라 할 수있다.
독자는 그가 글을 읽고 있는 지 아니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지 혼동하면서 자신의 신체와 글과의 사이에 제 3의 공간을 창출해 낸다. 이 과정에서는 신체의 에너지 소모가 극대화 되기 때문에, 간혹 정력의 눈금이 바닥을 치는 이들은 잠으로 빠져들게되고 글들 위로 침을 방출하거나 글들의 공간을 자신의 신체와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 손상 혹은 해체 하기도 한다. 그 반대의 경우엔, 대개 유체이탈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 신기류의 공간이 글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공간과 차별성이 미미해 보이기 일 쑤이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이 "독서"라는 과정중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고, 그 신기류의 정언명령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다른 작업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까 난독증의 끝은 결국 독서를 자연스레 멀리하는 어떤 경지로의 이행이다.
내가 그러니까 지금 그러하다.
넋이 나가있다가 깨어나 보면 뻘 짓을 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말이다.
2007년 9월 4일 화요일
George Owell 의 영작문 6원칙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The Owell Reader 에 실려있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영작문 6원칙.
1. 이미 익숙하게 보아 온 은유, 직유 혹은 다른 형태의 구어체는 절대 쓰지 말라.
2. 잛고 명료한 단어가 있다면 절대 긴단어를 쓰지 말라.
3. 만약 불필요한 단어가 있다면, 항상 제거하라.
4. 능동태를 사용할 수 있다면 절대 수동형을 사용하지 말라.
5. 만약 같은 뜻의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외국어(라틴어계열) 문구, 과학용어 혹은 특수용어를 사용하지 말라.
6. 야만스럽게 말하려면, 이 규칙의 어떤 것이든 어겨라.
한글 작문에도 충분히 적용될 만 한 원칙인 듯 하다. 그런데 언제적 오웰이란말인가?
2007년 9월 2일 일요일
과음의 상처. 절제의 미덕
20대의 밤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겨 둬야 할까?
술마시고 깬 아침
기억이 지워진 상처들을 확인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절제의 미덕. "됐어요" "이제 그만"의 자리가 삶에 영토를 확보해야 할 순간이 온 듯 싶다.
** 저 스팟 리무버 효과가 참 좋아 다행이다.
적용의 예에 쓰여진 " Animal accidents " 가 날 당황스럽게 했지만서도.
2007년 8월 28일 화요일
개강! Michael Hardt's Contemporary European Thoughts
방학숙제 안하고 개강한 학생에게 개강은 두려움이다. 깔끔한 시작은 언제나 가능한 기획이 될 것인가?
이번 학기 첫 수업은 마이클 하트의 동시대 유럽 사상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 옹의 자본론 강의와 무딤베옹의 지식의 고고학 강의 중에서 하나를 들을까 계획을 했었는데, 난데 없이 TA 수업 시간이 화요일 목요일 오전으로 잡히는 바람에 두 옹의 "강의"는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됐으니 아마도 하트의 이 "세미나" 수업을 선택의 여지 없이 듣게 될 것 같다. 처음 입학했을때 동시대 이탈리아 사상 강의를 무엇보다 듣고 싶었었는데, 그땐 과의 집답회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포기했었다. 어쨌든 하트와 다시 공부할 기회를 가지게 됐다.

강의계획서를 보니 이번 학기에는 Laclau, Zizek, Badiou, 그리고 Rancière 의 사상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짜여져 있는데, 하트의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동시대 "잘나가는" 사상가들을 통해 1. Revolution 의 개념을 Authority 와 Hegemony 의 관점과 더불어 사고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고찰해보고, 2. 이 사상가들의 논지와 Marxism 과의 관계를 분별해 내며 3. Multiplicity 와 Democracy 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단다.
사실 지젝을 제외하고는 내가 직접 읽어본 것이 거의 없는 사상가들인데, 라클라우는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 비판으로 이름은 좀 들어봤었고, 그런식으로 이름만 들어본 학자들이니 당장 그의 기획에 대해 별다른 판단을 해볼 만한 것은 없다. 다만 하트 스스로도 말했듯 한 라인에 놓기 힘든 랑시에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명은 다들 psychoanalysis 와 political analysis 의 동조에 그 이론적인 기반을 두고 있는 바 그러한 기획들의 가능성과 한계들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듯은 싶다.
![]() Alain Badiou | ![]() Ernesto Laclau | ![]() Ranciere |
세명은 생긴 것도 다 인텔리처럼 생겼는데, 하트 수업 첫시간에 항상 듣게 되는 아카데미 뒷담화를 펼쳐놓아 보자면 이렇다.
바디우는 들뢰즈와 한 철학과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항상 들뢰즈와 함께 연구를 해보고 싶어 했단다. 그런데 들뢰즈는 바디우를 거들 떠도 보지 않았는데, 바디우가 몇통의 편지를 들뢰즈에 보내 자신의 진지한 존경과 구애를 표명하였음에도 들뢰즈는 살아 생전 단 한번도 답장을 써본 적이 없다고 한다. 결국 바디우는 들뢰즈 사후 들뢰즈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데, 그 책이 The Clamor of Being 이다.
랑시에는 알튀세의 제자였는데, 알튀세의 많은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스승에게 반기를 든 Rebel 이었단다. 스승의 그림자도 안밟는다는 동양적 정서에서는 매장되고도 남을 일일텐데, 적어도 그는 혁명에 관해 진지한 클래식한 학자라고. (하트는 요즘 "뜨는 다른 이들"과 랑시에의 차이를 강조했으나 어쨌든 자신의 수업 내에 통합시켰다.)
라클라우. 현재 담론지형에서 하트와 어찌보면 가장 적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하트와 한 컨퍼런스에서 부딪쳤을 때, 그러니까 하트가 당신의 사상내에서 헤게모니나 권위와 같은 것이 점하는 자리는 논리적 모순의 자리가 아니냐고 했다는데, 라클라우왈 "그러니까 당신은 Ego 와 Ego_Ideal 를 구분할 줄 모르고 이해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트의 정신분석학적 무지를 질타했단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공부안해서 그렇다"는 류의 지적이야 말로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자세한 내용은 내가 아직은 알 수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하트는 그 일화를 언급하면서 자기는 Unconsciousness 같은 개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군. 그러면서 잠정적으로 자기는 라클라우의 문제가 Psychoanalytic truth 와 political truth 를 동일시하는 데 있지 않은가 싶다고, 프로이드가 진정 정치적인 진보성을 가진 이론을 제창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울 따름이라고 코멘트를 했다.
가십으로써 가장 재밌었던 뒷담화는 역시 라클라우와 지젝의 관계였는데, 라클라우는 아르젠티나 출신이고 마치 슬라보예 지젝이 슬로베니아의 대표 철학자로 간주되 듯, 라클라우도 아르젠티나의 "국가 철학자"의 지위를 유럽에서 얻어가고 있는데..... 아! 충격.. 지젝이 아르젠티나 젊은 모델과 결혼하고 아르젠티나를 주무대로 활동 중이란다!!!!!
![]() Zizek | ![]() Zizek's wedding |
라클라우는 그렇다 치고, 지젝은 이게 무슨 입 안다물어지는 가쉽인가??? 아무리 깜찍한 지젝이라고 할지라도, "결혼"을? !!! 그것도 젊은 모델과? (구글한 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과거 속옷 모델로 활동했었던 경험이 있고, 지젝을 만날 당시엔 대학원생이었단다. 그녀의 아버지는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
Love is Evil 이라던 지젝은 어디 갔는가? 이런 가쉽을 이제서야 알게되다니!!!
개인의 삶이란 역시나 예측 불가능한 Spontaneity 로 구성되는 것이란 말인가???
어쨌든 개강이다! 두통과 씨름의 시간이다!
2007년 8월 25일 토요일
U600 펌웨어 업글
http://cafe.naver.com/anyultra/6423
| [U600/608] 펌웨어 업글~ | | | Miniskirt 해외유저 |
| 2007.07.19 14:01 |
(^^;)
펌웨어 업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그래도 초기버젼을 고집하시는 것 보단... 한층더 업글된 펌웨어를 설치하시는 게 좋죠.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이 향상되어 있음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 자신의 펌웨어 확인 방법!!!!
*#1234#를 누르시면... 윗쪽 상단에 자신의 펌웨어 버젼이 표기 됩니다.
(저의 경우는 뭣 모르고 업글 시킨다고 깝죽 대다가... 제 초기 펌웨어 버젼을 확인 못하는 불상사가.. ㅜㅡ)
처음에 많은 분들이 "U600XXGD2"버젼을 극찬을 하길래.. 무턱대고 시도 하다가 "Froze" 되더군요. 그래서
T-Mobile 펌웨어라는 "U600BOGD4"시도 했는데.. 역시나 "Froze" 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돌리나
약간 당황되서 인터넷 검색을 한참 하다보니.. T-Mobile 사용자분들중 "U600DXGE1"버젼에서 업글하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받아서 설치 했는데.. 그 때서야 살아 나더군요 (한숨 돌렸습니다 --;)
* 펌웨어 다운로드 (^^)
http://homepages.pathfinder.gr/xux99/samsung/에서 "u600"을 선택하시면 펌웨어들이 나옵니다.
"처음으로 "U600 Optiflash"를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펌웨어 설치 프로그램 입니다."
* 펌웨어 설치 방법....
"Optiflash를 먼저 실행 시키셔서..." 펌웨어 화일을 설치를 위한 셋팅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다음의 경로에서 "Options > Settings > Generic" 아래 순서대로.. 설정 해주시면 됩니다.
1. Customer T: d830/d840/d910 (USB)
2. Flash Erase Passes' to '1'
3.
Operation Passes' to 'Default'
4. Uncheck all checkboxes except 'Differences
only'
4번의 경우는"Differences Only"를 제외한 모두 체크를 없애주라는데..
저는 다른 버젼의 펌웨어들이 설치가 안되고 "Froze" 되어 버리는게.. (--;)
4번 설정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의심 스럽더군요.
5. "Flash and Verify"에서 펌웨어를 찾아 주시면 됩니다. (s3 확장자)
6. "Default Contents"에서는 가끔 "s3"와 "cts"두개의 화일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cts 화일이 있다면
지정 해주시고 없으시면 "S-Record only" 선택 하세요 ^^
이러써~ 펌웨어 업글을 위한 소프트 "Optiflash" 설정은 마쳤고... 다음은 셀폰작업입니다.
1. USB 케이블을 컴퓨터와 연결하여 "PC Studio 3"를 실행 시키세요.
2. USB 케이블을 연결한 상태에서 "배터리"와 "Sim카드"를 빼시면...
(터치 패드와 가운데 버튼쪽에는 계속 라이트가 켜져 있습니다.)
3. "*"버튼을 누르시고 "power on" 시키시면 컴터에서 컴포트가 연결 되는데..(다음 작업을 위해)
4. "Options > Settings > COM Port"에서 자신에 맞는 포트를 위하여
"Control
Panel > System > Hardware > Device Manager > Ports (COM and LTP))에서
자신의
포트 넘버를 확인 하실수 있으며 "921600"로 설정 해주시면 됩니다.
이걸로써 업글 준비는 완료 된 겁니다. ^^
"이젠 flash를 실행 시키면 10분 여간 업데이트를 시작 합니다."
성공 하신분들은 펌웨어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있는지... 특징 설명 부탁드릴께요.
B&O사운드가 한층더 향상 되면서 예전의 바보 사운드는 다시는 볼 수 없다네요.
2007년 8월 24일 금요일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누가 썼나 했더니, 유학 오기 전에 꾸역꾸역 읽었던 "근대의 책읽기"를 쓴 천정환이다.
이젠 교수가 됐구만. 축하할 일이다.
사실 근대의 책읽기는 자료의 압박이 상당해서 정작 근대의 책읽기가 어떻다는 말이냐를 그다지 강렬히 남기지는 못했었는데 학위 논문이었으니까 이해도 된다. "성실성"과 "가능성 (잠재력)"은 비슷한 종류인 것 같아도 다른 것이어서, 둘을 함께 요구하는 경우엔 대개 가능성(잠재력)은 성실성으로 밖에 이해되지 못하거나 표현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인간시대" "성공시대" 스토리가 지식인의 것은 아닌데도 대개 그렇게 밖에 한국에서는 안그려지는 것이고, 어찌 보면 그 연장선상에 "디워"도 있는 것이니까..
그건 그렇고, 개념글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향한 생산"이 어떤 생산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여전히 "모범생"의 어떤 자리로 회귀하는 데, "대중의 생산"이 더 시급한 문제 아닌가? 어차피 매니아에서 생산의 힘이 나오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에 대중생산의 기저를 맡겨두고, 지식인의 한계를 논하는게 논리적 모순 아닌가? "OO지역 교수 OO명 이명박 지지선언!" "박근혜 캠프의 OOO교수"들이 가능한 세상에서 어째서 "디빠" 교수는 안나오는가?
사실 대중은 이미 그 논리를 알고, 시비걸고 있는 것 아닐까?
디워가 깐느 작품상 후보가 될거라고 기대하는 관객들 봤는가?
대체 오늘날 지식인은 누구인가? "신지식인 심형래?" "문화 게릴라류의 진중권?" 아니면 천정환 자신?
무엇보다 "대중"으로 파악하는 이상 "카오스모스" 같은 문제설정 밖에는 할 수 없어지고,
그것을 향한 생산도 "공장제 기계공업"에 대한 "공장제 수공업"적 도전이거나, 포드주의에대한 포스트포디즘적 발상 전환을 쫒아가는 것 밖에 있겠는가? "생산"은 이미 초국적이고 지구적 상황에 놓여있는데.
그리고 대개 "문학"에서 "문화"로의 이행을 언급하는 논지들은 "문학연구"를 결정적이고 본원적 기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기술자들의 "셀프 프로모션"이 지식의 장을 천박한 상업논리에 내주게 된 것 아닌가? "문화"-"문학"-"문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없어진 것이, 지식인들이 실상은 자기 생산엔 별로 관심 없고, 이행과 전환만 쫒아다닌 결과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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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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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6일 수요일
Justice Vs. Power - Chomsky Vs. Foucault
" Contrary to what you think you can't prevent me from believing that these notions of human nature, of justice, of the realization of the essence of the human being, are all notions and concepts which have been found within our civilization, within our type of knowledge and our form of philosophy, and that as a result form part of our class system; and one can't, however regrettable it may be, put forward these notions to describe or justify a fight which should--and shall in principal--overthrow the very fundamentals of our society. This is an extrapolation for which I can't find the historical justification. " --Foucault
2007년 4월 28일 토요일
[오마이뉴스] 원자탄 부품공장, 돈 폭격 맞고 '예술 거리'로
군수공장인 줄은 알았지만, 원자탄 부품공장인지는 몰랐다.
나는 군수공장을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 해낸 노력이 보기 좋기만 하고, 부럽기까지 하던데,
그건 역시 여행자의 순진한 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여행자의 순진함도 공간만들기에는 아주 중요한 힘 아니겠는가? 여행자가 "아무데나"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지.
솔직히 나는 도시라는 공간에서는 공동묘지터도 아파트단지나 쇼핑몰로 변신하는 한국에 좀 질려있었던 터라,
공간의 생산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유적이 발굴 되도, 땅값 떨어지고 재산권 침해 당한다고 그 유적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이해도 되는" 사회가 아니던가?
인터뷰 내용에서 보 듯, 이젠 중국 화가들이 농부로 일해야하는 시대는 아니고 보면,
예술의 젊은 영혼이 자본주의 세계시장과 고립되서 성장하기만 바라는 것도 너무 순진한 발상 아닌가?
그 옛날의 "순수예술"론의 재탕도 아니고. "예술엔 돈도 든다."
어쨌든 자본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지 자본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은 조금은 상투적인 지적인 듯.
여행 기억을 더듬어 보니, 베이징의 인사동이라던 그 전통 예술 거리는 798에 비해서는 많이 썰렁했던 것도 같다.
사실 자본의 무관심이 만들어내는, 예술계의 세대변화의 자리를 보는 것이 베이징 예술계를 보는 더 유효한 자리인 듯도 싶은데. BBC 같은 데서는 벌써 이미 그것에 주목하고 있고.
그나저나 그 거리 이름이 뭐더라? 그림도 한두장 샀는데 거기서는.
"따샨쯔"에서는 사진찍고 커피만 마셨지만...
내 사진은 다음에 올리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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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향기에 봄이 익어가는 2007년 4월 중순의 798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798은 베이징공항에서 시 중심으로 향하는 중간에 있는 특수 지역을 말한다. 숫자가 말해주는 곳은 이 곳에 있었던 공장의 번호다. 그런데 이 곳이 5년 전부터 갑자기 변화를 시작해 중국 미술 등 예술문화의 바로미터가 되기 시작했다. 기자가 그 곳에 들렀을 때도 곳곳에는 새로운 전시를 위한 공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펑키 스타일의 예술가들과 아직 남은 공장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펑키 예술가와 공장 노동자들 길가에 주차한 차들을 보면 798이 얼마간 돈의 폭격을 받았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실제로 798은 생겨난지 4~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예술특구가 되면서 연 수백%의 성장을 하는 지역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폐공장의 가치가 급속히 상승한다는 것이다. 과거 ㎡당 몇 위안에 지나지 않던 월 임대비가 매년 급성장해 지금은 수십 위안을 호가한다. 하지만 이 곳을 향한 해외의 관심은 휠씬 더 강하다. 798로 불리는 따산즈와 인근 아라리오·이수청에는 서울 인사동의 갤러리 아트싸이드를 비롯해 카이스 갤러리, 아라리오 갤러리, 표 갤러리, PKM 갤러리, 이음, 문 갤러리, 공화랑 등이 진출해 있다. 정치인 출신인 구천서씨도 초대형 규모의 '구 아트센터'를 5월에 문 열 예정이다. 그밖에도 동경화랑 등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적지 않은 화랑들이 이곳에 들어오고 있다. 프랑스에서 인테리어를 공부하고 온 조일행씨는 얼마전 798에 들렀다가 자신의 공부한 학교를 나온 프랑스인을 만나고, 동서양 예술 무대가 좁아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798로 상징되는 베이징 동북부 예술 지역은 당대 중국 미술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중국 정부 협조로 집중 기획 개발
그런데 이곳에 수년 전부터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앙상한 시멘트벽을 허물어 작업실을 꾸미고, 밖에는 자기만의 벽화나 조형물을 만드는 현대 예술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근의 이수청이나 아라리오까지 합치면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큰 미술 단지를 형성한 것이다. 이같은 형태로는 상하이 쑤저우허 인근의 '뭐간산루'나 '신톈디', 광저우의 예술거리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크기나 명성에서 798의 상대가 안된다. 798의 가장 큰 특징은 의도적으로 기획된 곳이라는 점이다. 중국 정부의 협조하에 집중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이후 이 곳을 부양하기 위한 정책이 나왔다. 이들은 순수한 미술혼도 있지만 기존의 권력과 유사한 힘을 찾기 위해 2006년 12월 2일 이곳의 한 갤러리에서 '798당대예술회'를 개최했다. 장야난, 이화, 장스용 등이 주도한 이 모임은 기존의 미협 등과 대칭되며, 자신들의 예술을 조직화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표어도 '지금의 798, 너는 당대에 있다, 798은 당대 예술모임이다. 당신을 위한 예술생활을 추구한다'. 구역을 당대로 축소해 기존 세력의 공격을 피하는 한편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려는 특성이 강하다. '스타'와 '엔젤'이 만나니 콘텐츠가 798의 가장 큰 장점은 콘텐츠 창작을 위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798이 있는 따산즈에서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중앙미술학원이 있다. 이곳은 중국 미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저명한 학교다. 798과 유대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커리큘럼을 확충하고, 798은 이 학교에서 예술가를 수혈받는 공생관계가 되었다. 학교가 바탕이 되면서 기존 미술계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798의 탄생을 쉽게 한 것 가운데 하나가 중국 현대미술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도 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1966~1976)을 거치면서 화가들이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공부를 할 수도 없었다. 10년의 문화공백은 넘기 어려운 골짜기였고, 상대적으로 미술협회 등 기존의 단체가 확보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거기에 엔젤 투자가 넘치는 것도 798을 성장하게 하는 힘이다. 중국 고급부동산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설치미술이나 현대 미술의 판로가 쉽게 열렸다. 결국 조직력을 갖춘 798 운영 주체가 학교, 미술가들이 결합하면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958년생인 장샤오깡은 소더비 등 경제시장에서 작품당 기본 낙찰가가 30만불을 호가하는 당대 최고의 미술가로 자리잡은 작가인데, 지난해 5월 798에서 신작전을 열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장샤오깡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통해 개인과 집단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으며, 최근에는 국내 미술 전문지인 <아트>지에서 특집으로 다루기도 한 작가다. '인민을 위해 서비스하자' 그러나 "자본 결탁" 비판받아 하지만 798에도 혼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엄연한 사회주의 국가이고, 예술도 그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798의 홈페이지(www.798.net.cn)를 열면 '인민을 위해 서비스하자'는 마오쩌둥 문구로 시작된다. 21세기에 사회주의 문예좌담을 논하는 것은 복잡한 시선을 자아낸다. 실제로 798의 화랑 가운데는 사회주의 창작론을 소재로 삼은 곳들이 적지 않아 독특한 느낌을 준다. 한 서양화가는 최근에 798을 다녀오고 많이 실망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명성에 비해서 그다지 수준도 높지 않고, 싹이 트기도 전에 자본에 결탁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런 평가들에 대해서 중국 내부에서도 대부분 공감한다. 중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리시엔팅(68)도 우리 화랑인 '아트사이드'의 개관식에 참여해 "중국 작품가가 치솟는 것은 세계 속에서 중국의 문화적·경제적 지위향상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기 보다는 경제적 거품이다, 예술은 돈이 아니라 작가의 감각, 생각을 영원히 중요시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작가들은 알아야 한다"고 중국 작가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현상은 798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국 미술 시장에서 큰 손으로 불리는 에이전트들의 상당수는 부동산에서 시작했다. 그들은 상하이 등의 고급 부동산을 손대던 이들이다. 돈이 넘쳐서 주체를 못하던 이들 가운데 일부가 부동산에 대한 재투자 대신에 미술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고급주택에는 그럴싸한 미술품 소비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갤러리를 만들어, 창고에 넣어둔 미술품들을 내걸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장 고평가 받는 박수근의 그림들이 최고 25억원에 팔린 반면에 중국의 미술시장은 아직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다. 이런 인프라 때문에 중국 내 자본은 물론이고 해외 자본이 들어오면서 798의 성장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반면에 예술 창작 수준이 하루 아침에 올라갈 수 없고, 거기에 배까지 부르면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화됐다. 798의 급속한 부유화는 작가들의 창작력 저하를 낳기도 한다. 최근 젊은 작가들을 섭외하는 한 갤러리의 대표는 이제 그들과 최고급으로 약속 장소를 잡지 않으면 만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면서 미술계의 부유화를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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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3일 월요일
[출판시장 #2] 인문사회과학자들의 푸념.
어디선가 성찰적 목소리가 엄습해 왔다.
단지 출판 시장 탓을 할 것 인가? "독자의 사망"은 "저자들의 자살" 합리화가 아닌가?
현재의 인문사회과학의 지적 풍토가 고전들 마저도 논술, 구술 수험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면 인문사회과학자들이야 말로 새로운 독서 가능성을 만들어내야할 사람들이지 않나 싶다.
왜 오늘날 플라톤을 읽는 것이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어떻게 세익스피어의 서사구조와 물음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이 되는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연구나 논문에는 그들이 독자와 주선 한 "소개팅"이 없다.
대부분의 최근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글들은 그저 "독백체"의 "장인의 언어"만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 문헌들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 할 지라도 장인들은 진정 "도구"와 "재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할 터인데,
"지에 대한 사랑"이 "직업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되는 작가들의 현실이,
소통 불가능한 지식 생산의 분업체계를 공고화하고, 생산과 소비의 소외현상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는 듯.
Production rules markets !!
2007년 4월 21일 토요일
세계 최대의 번역서 출판 시장 "한국"
그에 따르면, 2004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출판된 서적의 29%가 번역서로, 그 비율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세계 1위를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지식과 앎의 식민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까?
물론 아직도 한국에는 소개되어야 할 많은 번역서들이 채 번역 되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전 플라톤 전집의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어떤 철학자 집단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미 서구 인문학에 대한 연구 혹은 "수입"이 한 세기 가까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이렇게 "기본 번역서" 출간 마저 늦춰지는 풍토라는 것이 한심스럽기 까지 하다. (그 기사의 내용도 눈물겨웠다. "사재를 털어.."류의 기사였는데, 그나마 소명감을 가진 지식인 집단이 있다는 사실에 따뜻해지다가도 이내 안타까움의 물결이 덥친다.)
시장의 29% 를 차지한 번역돌풍도 이런 "지적 결핍"은 내버려 둔 채로 불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의 번역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서적들이란 이러저러한 성공담들, 심지어 하청 번역 논란까지 일어났던 "마시마로 이야기" 같은 책들이 주종이다.
출판 시장에서 "기획"은 대개 이런 잘 팔릴 것 같은 "번역서"를 찾아 내는 것으로 변한지 오래된 것 같다.
외국의 인문사회과학 서들은 반면, 번역 성과를 연구성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교수평가제의 영향에다가 전문번역가 집단의 부재라는 상황, 책을 안사보는 대학생들의 놀라운 반지성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번역시장의 독과점 현상이라는 문제가 이 세계 1위 번역출판 시장의 지표 내부에 또다른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일반적 우려와는 달리, 번역이 반드시 지적 식민성 만을 결과하는 것은 아니다.
뜬금없는 이야기겠지만, 외국의 위인 전기를 읽으며 자라난 - 이른바 계몽사 전집 문고 키드들 - 이들의 사고가 서구화 되었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그랬으면 한국사회는 최소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도 있을 터인데 그런 것도 아니니 말이다. 때론 그렇게 "소비적" 독서, 몇권 읽었는지가 중요한 "양적" 독서들도 있기에 번역서 몇권에 한국 지식계가 식민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움이있다. 식민성은 단순히 정신적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생산하는 물질성에 근거한다. 5쇄 10쇄 그렇게 기록을 경신하며 찍어져 나갔던 "마시마로이야기"들 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식민성을 논하기 보다는 차라리 시장의 다양성, 그리고 "출판"이라는 지식생산의 다양성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으로 보인다.
마시마로 이야기나, 외국의 성공담이 외국서적이어서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71%의 서적들도 똑같은 분류의 책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아마도 71%의 상당수는 또 이러저러한 수험서, "영어에 바다에 빠져라"나 "10억 만들기" 시리즈들이라는데 있는 것이다.
시장에 특정분야에 대한 번역서만 넘쳐나게 된다면, 특정 형식의 지식이 시장을 지배하고 사고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여론의 획일화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마치 신문 가판대에 조선,동아,중앙 일보만 꼽혀 있는 경우와 마찬기지로 말이다.
다른 한편에서, 번역은 학계의 무시와 무관하게 그 자체가 대화이자 실험인 지적 실천이며, 또 하나의 창조이다.
번역을 둘러싼, 잘된 번역, 나쁜 번역, 오역등등의 윤리적 평가들은 그것이 실천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단순히 특정 외국어를 잘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능력과 규율이 번역가에게 요구되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고학력 실업자들의 증가의 덕택에, 외국어를 할 줄 하는 저임금 임시직 노동자군의 존재에 힘입어 "뚝딱" 번역서들이 다시 말해 책임지지 않는 번역들이 늘어나고 있는 세태를 목도하고 있다. 이 29% 시장 점유율 기사를 보며 씁쓸해 하는 또다른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FTA 협상에서 체결된 지적 재산권 보장 기간의 60년(?) 연장이라는 미국의 카드는 이러한 한국 시장에 기대고 있다고 보여진다. FTA가 체결된다면, 한국은 60년동안 유통되는 30%의 책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는 출판 시장이 될 것 이다. 책값은 더더욱 올라갈 것이고, 출판시장은 극도로 왜곡 되고 위축 당할 것이 뻔하다. 아무도 원고를 독촉하며 선수금들을 줘가며 저자들을 발굴하고 투자하는데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외국에서 잘 팔린 책들을 입도선매하는데 열을 올릴 것이 불보듯 뻔하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한국 시인 하나, 작가 하나 갖지 못하고, 한국학자의 이론을 통해 저자와 대화하며 공부해 볼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지적 유목민이 되기보다는 지적 부랑자가 되기 쉽상이리라.
2007년 4월 20일 금요일
애국적 사회진출론이라...
386 운동권들이 자기세대의 취업 풍경을 묘사하면서, 다시 끄집어 낸 말이다.
그렇다. 애국적 사회진출론. 전대협으로 대표되는 NL 다수파가 80년대 급격하게 이루어진 대중운동의 고양을 대학 밖으로 확장시키는 대안으로, 그리고 취업이라는 문턱에서 배신, 배반, 도피라는 악순환을 거듭하던 학생운동권에 서로 나중에 계모임이라도 할려면 명분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상식이 결합된 사실 "론"이랄 것도 없는 노선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던 인간들에게, 그저 사회가 떠밀어서, 얼마간은 "Peer Pressure" 때문에 사회에 응답했던 그 많은 전대협 십여만 학생들-전대협 출범식 최대 인파가 8만이었다니까 사실 이것도 좀 많은 추산인데-에게 "애국적"이란 딱지를 붙여서 사회에 내보냈다.
80년대 초반 학번이 이제 40줄에 들어섰으니 이제 학부모들의 다수가 되었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은 지나치게 "애국적"이어서 가끔 숨이 막혀 올 지경이다. 제기랄!
어차피 취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것이 맑스가 말한 임노동의 본질이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알아서 일감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생리란 말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부모 잘 만나 ,태어난 이후 삶 자체가 복권 당첨 이후의 시기로 구성되어 있는 삶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이른바 그나마 그 십여만의 다수를 이루던 농촌출신, 쁘띠중하층 이하의 출신성분을 가진 다수파를 지칭하는 것이다. 어쨌든 브나로드나 위장취업 같은 계몽운동도 아닐바에야 무슨 사회진출론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아귀가 안맞는 시작이었다. 위장취업의 전설 손학규옹과 김문수옹을 보면 한때 "독립운동" 하 듯 운동했던 것도 별 차이는 없다.
생각해 보면 그당시 운동권들 사이에서는 졸업을 앞두고 있는 이들의 이런 고민을, 또 나름대로 그럴싸한 언어로 부르곤 했다. "전망" 아! 꿈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스스로의 삶에 대한 "전.망."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자기 조직에 잡아두려는 인간들의 쪽수 싸움이 한참 치열하던 때(이른바 대중운동 합법운동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민주주의적 "다수결"의 원리가 운동내부에 인입되던)에-지금도 민노당을 보면 여전하지만-한번 굴러온 호박은 못 먹고 썩을지라도 내 창고안에 두겠다 혹은 요즘 컨셉으로 치면 "어장관리"를 하고 싶어하는 안달이, 전세계 운동사에 있을까 싶을 "애국적 사회진출론"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뭘 하든 조국을 배신하지 말자는 붉은 맹세를 하면서 그들 삶에 마지막일 의례들을 치루면서 말이다. 하긴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그러고보면 이런 애국적 사회진출론의 씁쓸한 그림자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공지영류의 후일담 문학도 그렇고.
애초에 대학생을, 최소한 자유로운 지성이자 시민이어야할 그들의 삶을 운동권 상층이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자체가 글러먹은 발상이고, 직업혁명가도 아닌 이들은 억지로 골방속 담배찜하여 "취업"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게 하려는 전략도 될 일이 아니었다.
직업혁명가, 운동가들은 제 할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제 갈길은 누가 일러줘서 가는 길이 아니다.
하여 서로 갈라설 땐 확실하게 갈라서고, 가는 길을 분명하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보다 치열하게!
생각해 보면, 자신들이 어설프게 붙여준 대중 작위,
"애국적 사회진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앵벌이하듯 운동할 맘을 먹은 순간부터,
이놈의 386들은 썩은 냄새 풍기기 시작했던 것 아닌가?
요즘의 한국 정치판은 어떠한가? 무슨 정치 단체 발기인들은 어째 그리도 옛날 선후배들 모임을 못 벗어나고 있는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을 그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라!
그럼으로써만이 그들은 모든 외부적 압박으로부터 스스로 헤쳐나오는 법을 배울 것이다!
"진출" 좋아 하시네! 무슨 직업학교도 아니고!
좀 상관은 없지만, 여전히 운동권들은 대학원 가기 좋아하나 보다.
뭐 학교에서 애들하고 어울려 노는 맛을 아는 것이고, 취업 전선에서는 어느 덧 멀어져 있는 인생들인데다가,
인문사회과학의 전반적 몰락 덕택에 그나마 책 몇권이라고 읽은 대학생은 운동권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좋다 까짓 것. 하지만 삶을 유예하듯 사는 것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음을, 어쩌면 우리의 인문사회과학 젊은 학자들 중에 학계에 새바람을 몰고 오는 학자 한명 찾기 힘들게 된 것도, "애국적 사회진출"은 아닐 지언정 "어영부영 흘러든" 혹은 "오갈데 없어진" 운동권 퇴역자들 집중 현상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씁쓸하다. 시작은 그러했을 지언정 끝은 달라질 필요가 일을진대! 나보고 하는 말이지만!
2007년 4월 18일 수요일
"한국인으로서 미안하다 ?" - Virginia Tech 총기난사 사건을 보며.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범인이 중국계 아시아인이라고 "안도"했다는 사람들이 범인이 한국 "국적"의 미국 "영주권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범인의 부모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확인 안 된 뉴스도 대서 특필되고 있다.
오늘 듀크 인터내셔널 이메일 리스트에도 한통의 이메일이 날라들었다.
제목은 "한국인으로서 미안하다"이다.
이 메일을 받는 순간, 나는 너무나 불편해졌다.
곧바로 미국인들은 "네가 한국인으로서 미안할 문제는 아니다"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국인으로서 미안"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등장하고 있고, 오마이뉴스에는 촛불 추모를 하자는 주장까지 내걸리는 추세이고 보면 대체로 공감을 하는 "미안한 감정"인가 보다.
도대체 "한국인으로서 미안하다"는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때는 한국인이 가해자 아니어서 그리도 남의 일 보듯 했고,
이제는 범인이 한국 국적자이기 때문에 한국민이면 모두가 미안해 해야 한다는 것인가?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지만,
범인이 한국국적이라서 미안하다는 논리에는 아주 무섭고도 폭력적인 논리가 스며져 있다.
사건을 냉정하게 바라 보면, 조승희라는 학생은 8살 때 이민을 가서 대부분의 교육과 성장을 미국에서 한 "법적 미국 거주자"이다. 24살이라는 나이도 사실 스스로의 행동에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을 질 나이가 지나도 한 참 지난 나이가 아닌가?
그런데 왜 어떤 다른 집단이 그것도 그와 "국적"이라는 방식으로 밖에 동질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미안하다고 해야하는가?
바로 이런 논리가 조승희의 가족과 부모를 살 수 없게 만드는 "연좌제"적 논리이고,
한사람의 잘 못을 극단적으로 그가 소속되어 있던 집단 전체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대중적 광기와 쇼비니즘아닌가?
최소한 조승희가 한국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다니던 학생이었다면, 정부의 사과와 책임있는 자들의 사과가 뒤따를 수 있겠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미국 군인의 장갑차에 죽은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고 미국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던 것은 그들이 미국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과 "작전" 중에 범한 잘 못 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 미국국적의 한 운전병의 잘 못 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스스로를 뒤돌아 보고, 여러 성찰적인 논의들 예를들어 조기 유학과 이민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해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이번 사건에 대해 한국인이기 때문에 미안해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외교부를 통해 공식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았는가?
사실 한국인이 때문에 미안하다는 논리를 다른 한측면에서 보자면, 그 속에는 강렬한 "자기 방어"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나는 그와 달라"라고 선언함으로써 생존하고 픈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식으로 "빨갱이 아비"를 둔 이문열은 극우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되돌아 봐야 할 것은 미국(인)으로부터 보복 당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우리 자신들이다.
이 뿌리깊은 민족적 강박과 불안이 오히려 문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국인으로서 미안하다"가 너무 쉽게 정당화 해버리는 "한국인이니까 책임져라"는 논리를 떠올려 보며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자신의 면책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냉정을 잃어버리면 스스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이번 사건은 끔찍한 사건이고 모두가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가 어느 국적을 가졌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통제불능의 학원 폭력 문제에 대해서, 적당한 자기표현의 방식 마저 잃어버린 조기 유학생의 사례에 대하여, 다민족적 사회가 겪을 수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고민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 같다.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과 사건을 경험한 모든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자.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해야할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비정상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07년 4월 6일 금요일
Dirty Kuffar
오늘 TA 수업시간에 파키스탄 출신 강사가 학생들에게 보여준 뮤직비디오다. 보여준 이유는 지하드를 찬양하는 이슬람세력이 글로벌 미디어등을 이용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경각심" 혹은 "문제제기"를 하고자 했던 것인데, 아이들은 조금 충격을 받았던 듯.
몇명의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사실상 미국도 이와 반대되는 이미지를 생산해 내고 있으니 똑같은 거 아닌가 하는 지적도 나왔다.
이후에 지속된 초청강사 브라언의 강의 중 덴마크에서 시작된 이슬람 카툰에 대한 논쟁은 흥미로웠는데, 그 카툰 논쟁 속에서 서구의 자유주의적 담론이 봉착하게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물음은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모욕이라는 폭력성이 교차하는 담론 구조에서, 그 교차 지형의 윤곽을 그려내고, 새로운 윤리적 논리를 도출해 내고자 하는 노력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브라이이언의 고통에 대한 문제 제기.
좋은 고통과 나쁜 고통이라는 두가지 분기점이 항상 만들어진다는 점을 윤리적으로 강조한 부분이다.
예를들어 의학적 시술에 뒤따르는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과 그것의 수사적 가치를 전유하는 현실 정치와의 관계에대한 분석은 무척 흥미로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마취"와 "안정제"등등 고통을 잊게 하거나 감내 할 수있는 다양한 노력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닌가?
몸에 기록되는 고통의 흔적들이야 말로 살아있음을, 혹은 살아왔음을 확증하는 것 일텐데.
예수도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힌 전력에다가 그 고통의 극한에서 "순교"를 택한 이미지 때문에 먹어주는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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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옵저버에 실린 노래 Dirty Kuffar 에 관한 기사다..
Islamic rappers' message of terror
Antony Barnett Sunday February 8, 2004 The Observer
Islamic rappers' message of terrorAntony Barnett Sunday February 8, 2004 The Observer
It's rap, jihad-style. A music video with blood-curdling images, fronted by a young British Muslim rapper brandishing a gun and a Koran is the latest hit in radical Islamic circles.
The rap song is called 'Dirty Kuffar' - Arabic for dirty non-believer - and it praises Osama bin Laden and the attack on the World Trade Centre in New York. The video has recently been posted on the British website run by the Islamic extremist Mohammed al-Massari, the UK-based Saudi Arabian dissident who has lived in Britain since 1994. Al-Massari claims that the video has been selling in large quantities at mosques to the younger generation and is in heavy demand overs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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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deo might at first be mistaken for an Ali G spoof, but the violent images quickly reveal it is no joke.
The song starts with images of US marines in Iraq cheering as one of them shoots a wounded Iraqi lying on the floor. At the end of the video, it features shots of the hijacked planes flying into the Twin Towers with sounds of the rappers laughing. There is then a list of 56 countries they claim have been the 'victims of American aggression' since 1945.
The four-minute rap is essentially a repeated diatribe against the 'dirty non-believers' Tony Blair and George Bush, urging listeners to 'throw them on the fire'.
One of the most brutal images shows a jihadist fighter in Chechnya riddling a captured Russian soldier with a Kalashnikov. Another image labels Pakistan president General Pervez Musharraf a traitor and shows photographs of Colin Powell and Condeleezza Rice with the words 'still slaves' superimposed across their bodies.
Labour MP Andrew Dismore said he was 'disgusted' by the video and is to refer it to the Home Office and ask the police to investigate if any offence has been committed.
Dismore said: 'These extremist are using music and video to prey on young and impressionable Muslim boys in order to attract them to their brand of lunacy and entice them to commit acts of terror. It is inexcusable.'
The website on which the video was originally posted is run by the Committee for the Defence of Legitimate Rights in Saudi Arabia, a group run by al-Massari who came to Britain in 1994 after being imprisoned by the Saudi regime.
He said: 'A boy came to me and showed me the video and I thought the content was good, although I am no expert on rap. I thought it was an excellent attempt to use modern methods to get a message across.'
Al-Massari did not see a problem in using Western music and MTV-like images to sell a message of jihad. He said that it was an effective way of attracting young Muslims who had been put off by other Islamic sects such as the Taliban, which banned music and dancing. 'I do not know of any young Muslim who has not either seen or got this video. It is selling everywhere. Everyone I meet at the mosque is asking for it.'
Al-Massari denied that the messages in the video incited Muslims to take part in terrorist attacks against the West.
He said: 'I believe the lyrics are only metaphorical. It is not like this is a fatwa.'
In November 2002, al-Massari circulated a 4,000-word message allegedly from Osama bin Laden. In 2001, al-Massari was granted permanent residence in Britain, five years after Michael Howard, then Conservative Home Secretary, tried to deport him.
Excerpt from 'Dirty Kuffar'
Peace to Hamas and the Hizbollah
OBL [bin-Laden] pulled me like a shiny star
Like the way we destroyed them two towers ha-ha
The minister Tony Blair, there my dirty Kuffar
The one Mr Bush, there my dirty Kuffar...
Throw them on the fire
900명 피해가 엄청난 피해가 아니라굽쇼?
그래 변했다고 치자. 대통령 노무현은 내가 알던 노무현이 아니라고 치자.
그럼 정치가로써 노무현을 보자. 그는 어떠한가?
정치적 미숙함은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 기왕에 FTA가 나라 경제를 살릴 해법이라고 그럴싸한 "사기"를 치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어떻게 이익을 극대화 할 것인가에 대한 "호통"이 뒤따르는게 수순아닌가?
산업자원부, 외교통상부등등에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그 이익을 사회적으로 환수할 기반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현명한 협상타결이후의 후속조치가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 이익을 농수산업으로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내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었을까?
사실 우리나라 농수산업이 이미 어떤 "구호"의 방식으로 조성될 미래가 없어진 것은 이미 10여년전 우르과이라운드, WTO 협상때 부터서이다. 이미 박정희 때 부터 남한 정권은 일관된 탈 농수산업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 왔던 것이고, 국민들도 농수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내왔던 바는 아니다. 한 예로 직선제 개헌 이후로 줄 곳 등장했던 농가부채 탕감도 이젠 아무런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한미FTA 협상 타결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조사에서 50% 이상의 지지로 나타나듯이, 국민들은 농수산업 피해가 큰 "충격"으로 자신들의 삶에 닥치리라고 생각하는 감각이 무뎌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감 있는 국가 지도자 혹은 정부의 태도란 국가적인 정책 수립의 담당자로써 이미 "체념한" 국민들에게 다시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그들이 주장하는 공공의 이익의 극대화를 현실적으로 가능한 형태로 제시해 내는 것일 텐데, 왜 FTA의 피해만 강조하냐고 버럭 화를 내는 수준이야말로 그가 그렇게 벗어던지고 싶다고 했던 제왕적 대통령, 독재자의 이미지가 아닌가 싶다.
박정희만한 모델이 오늘의 노무현에게 있을까 싶은 어떻게 이렇게 이란성 쌍생아 정부가 되가는 것일까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을 최종적으로 내 기억속에서 지워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2007년 4월 4일 수요일
불여우? Firefox? !!!
비대해져가는 공룡처럼 기술집약과 독점의 문법을 만들어가는 사업 형태도 싫고, 어느 순간부터선가 사용자의 편리함보다는 써비스 제공자들, 비지니스 파트너들의 구미에 보다 더 철철한 플랫폼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특히 인터넷 브라우저는 최악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것은 핵커들의 주 된 공격 탓이기도 하지만, 프로그램 코드를 무슨 비문처럼 관리하고 관련 프로그램 개발자들에게 판매하는 방식에 의존하는 한 앞으로도 상당기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넷스케이프를 몰아내고 시장을 독점한 이후로는 권좌를 지키는데만 집착할 뿐 업그래이드가 가져다 주는 흥분을 가져다 주는데도 미약한 지경에 이르렀다. 업그레이드를 거부하는 사용자의 저항이 등장하게 되면 개발자와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시장 자체가 기술개발과 더불어 축소되는 현상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사용자와 개발자의 직접적인 관계에 의존하기 보다는 편법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길을 택하게 될 것이기에 결국 기술의 소외와 시장 지체를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저러한 반발의 축적 끝에 나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부분적으로나마 배반하기로 했고, 하여 미국에 와서 쓰기 시작한 브라우저가 파이어팍스--한국에서는 불여우라고 부르는--이다.
웹표준과 문법을 지키지 않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한국의 사이트들에는 먹통이 될 때가 많지만, 익스플로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사용자 편의를 제공한다. 게다가 프로그램도 오픈소스여서 다양한 개발자들의 참여를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보장하는 프로그램이기까지 하다. (모든 열려있는 것들에 경배를!)
언제 파이어팍스도 익스플로러와 비슷하게 "수익모델"에 집착하게 될지 모르겠지만(현재까지는 구글과의 동맹전선이므로 거부감이 많이 상쇄되는 편이다), 현재는 소비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경쟁의 바람을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건 그렇고 한국의 일부 사용자들이 일반적으로 "불여우..불여우"해서 정말 불+여우의 합성어인지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파이어팍스는 중국과 히말라야, 미얀마에서 발견되는 붉은 털을 가진 팬더 곰의 일종이란다. 불여우가 아니라 붉은 팬더였던 셈이다. 이 이름이 최종적으로 사용되기까지는 이래저래 우여곡절도 많았다는데, 자세한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조해 보시라..
http://news.com.com/2100-7344-5156101.html
2007년 3월 20일 화요일
최루탄에 대한 단상 + [뉴스메이커] ](16)공청협② 학생운동권 ‘코어’ 세상 밖으로
이 최루탄이 부시탄으로 명명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 부시의 방한 반대 시위에 처음 사용되었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당시 인구에 회자 되었던 이유는 이른바 가투 전선에서 "전투조"들을 공포에 떨게했던 신 진압 무기였고, 많은 이들이 이 변종 최루탄의 등장에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SY-44 는 말 그대로 직격탄으로 맞으면 상당한데 나도 발에 맞았을 때(그 전경은 아스팔트위에 미끄러지듯 조준해서 발사했었다. 머리 안 맞춰줘서 다행이다) 한동안 파스를 바르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이한열은 이 직격탄에 희생되었다는게 정설이고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이 두개골 함몰, 실명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사과탄은 주로 "백골단"으로 불리웠던 사복 체포조들이 사용했던 최루탄인데, 대개의 경우엔 평화시위중 몸싸움 와중에서 사용되거나, 최루탄 발사기 사용이 용이치 않은 건물 진입시에 사용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이 백골단의 위용은 91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영안실을 드릴로 뚫고 들어온 사진 한장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사과탄을 맞으면, 안경쓴 사람은 안경알이 깨질 정도고 실제로 많은 대학생들이 그로 인한 실명의 공포속에서 가투를 해야했었다. 냄새보다도 파편의 공포가 심했던 최루탄이라 할 수 있다.
지랄탄은 주로 공포의 검은차 "페퍼포그"에서 주로 발사 되는데, 포물선을 그리고 땅에 떨어진 이후 마치 폭죽처럼 정신없이 최루가스를 뿜어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건 한번 노출되면 위액을 쏟을 정도의 고통을 주고, 초심자들은 대개 대열에서 낙오하게되서 대부분은 "딸려가게" 된다. 하지만 학생운동 전투조의 신화라는 "오월대" "녹두대"의 싸움꾼들에게는 이것도 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랄탄은 일단 땅에 떨어진 후에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가스 분사를 시작하는데, 그전에 이 지랄탄을 집어서 전투경찰 편으로 던져 버리거나. 가스 분출구를 지면으로 향하게 하거나, 발로 분출구를 눌러서 분사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법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부시탄은 상황이 달랐다. 지랄탄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참" 전투조들이 발사된 탄을 손으로 붙잡을 즈음 사과탄과 비슷한 방식으로 폭발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버지 부시 방한 반대 투쟁시 파편에 손을 다친 사람들이 상당했다. 지랄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시위대에 나름 시간을 벌어주어 "매트릭스 신공"을 부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었다면, 부시탄은 직격 조준에 가까운 발사 방식에다가 날아오는 속도도 상당히 빠르고, 발사후 자체 폭발 시간도 대체로 짧은 편이어서 시위대열을 속수 무책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 가격이 비싸서 그랬는지, 아니면 "최루탄 부상"에 대한 사회적 압박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 학생운동의 대중동원력이 사그라들고 폭력시위에 대한 압박으로 비폭력투쟁 중심의 노선이 채택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시탄이 그 이후로 자주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여 부시탄은 그렇게 전설로 남아버린 최루탄이 되었다. 그 때 이미 한국에서 수출한 최루탄이 그 지나친 독성으로 인해 외국에서 반품 받았던 시기기도 했었다.
사실 물대포의 시대에, 고무총의 시대에 최루탄을 떠올려 보며 드는 생각은, 영웅적 가투 협객들의 무용담이 아니다. 오히려 간간히 떠오르는 것은 그 시절 최루탄 발사와 투척규정을 어기면서, 안전핀을 뽑지 않고 불발 최루탄들을 발사했던 어느 가려린 청춘들의 잔상들이다.
얼마전 본 The lives of others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손씻은" 협객들에 대한 회한 때문일까?
어쨌든 부시 방문 반대 투쟁을 벌였던 남미 곳곳의 시위대를 보면서 부시탄의 추억을 떠올리며 착찹해 지는 밤이다. 최루탄 없는 세상에 살게된 것은 행복한 일이나 우리는 어느덧 세상의 문제들에 함께 기침하고 눈물 흘리던 어떤 추억도 잃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올해가 6월 항쟁 20주년이라나?
아래는 요즘 기준에서는 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를 한국 환경운동의 전사에 대한 재밌는 기사다.
한국에서나 가능했을 환경운동의 역사랄까?
그렇게 보면 의대생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응급의료반도 있었고, 누군가가 연구해 낸 최루탄 냄새 중화법(마스크에 파스 붙이기, 랩으로 얼굴싸기, 치약바르기, 담배연기 불어주기, 물안경쓰기등등)도 있었는데 말이다.
한가지 적어둘 것은 아래 부산 민주화운동 기념관에 있다는 전시물인데, 무슨 큐레이터쉽인지 잘 이해가 안가지만서도, 화염병으로 전시된 칠성사이다와 맥주병은 좀 거슬린다. 부마 항쟁때 사용된 것은 아닐 테고, "사이다는 역시 칠성사이다"라는 상징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좀 리얼리티가 떨어진달까? 물론 그때는 NL 친구들이 "미제 똥물"이라며 커피 콜라 안마시기 운동하며 맥콜 마시던 조금은 코믹한 시대이기는 했다. 그러나 사이다병 맥주병은 잘 안깨지고 학교주변에서 대량으로 구하기도 힘든데다가, 실제 사용에 있어서 비싼 신나, 석유와 노동력 낭비가 상당한 조합인데 재현적 가치가 좀 떨어져 보인다. 농담처럼들 했던 말이지만, 일단 그런 병자체의 "그립감"도 , "비거리"도 않좋다.
내가 나름 "군사작전"에 준하던 수행력과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광주의 남총련 경험을 특화시키는 것일까?
화염병은 역시 보해 소주병이 최고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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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협 ‘언더’ 활동가들 민주화 바람 타고 ‘공청협’으로 커밍아웃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날쌔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잠시 한낮의 고요를 깼다가 곧 잦아들었다. 그가 사라지자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는 그가 들어간 화장실에서 대각선 쪽으로 끝에 있었다.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은 그곳에 혼자 있었다. 동중정(動中靜). 그는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낸 적이 근래에 없었다. 수많은 집회와 강연, 회의 등에 참석하다 보니 어디 사무실에 앉아 있을 틈이 있었던가.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두 다리를 책상에 걸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번에는 정중동(靜中動). 눈을 감고 오수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머리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국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때는 19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열린 제2의 ‘서울의 봄’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시점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정문화(1998년 작고, ‘함께 사는 길’ 편집장 역임)가 나간 자리에 안병옥을 앉힌 것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안병옥은 침착하고 끈질긴 면이 있었다. 웬만해서는 별로 빛이 나지 않는 환경운동을 꾸준히 하기에는 딱 맞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더십과 조직력도 갖추고 있었다. 학생운동 그룹인 반공해운동협의회(이하 반공협)의 주축이고 구성원의 신망도 받고 있었다.
공문연과 반공협의 ‘동상이몽’
실제로 안병옥의 가세로 공문연은 활기를 되찾았다. 무엇보다 반공협을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반공협은 일정한 사무실도 없이 신림동 자취방, 대방동 차고 등을 전전하다 공문연이 있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연건빌딩 5층에 정식으로 사무실을 냈다. 바로 공문연 사무실과 같은 건물의 같은 층 대각선 끝이다. 안병옥이 공문연에 출근한 직후의 일이었다.
뒷날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가 되는 반공협이 공문연 코앞에다 사무실을 낸 데는 나름대로 의도가 있었다.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최열과 공문연을 업기 위한 것이었다. 운동권 전문용어로 말하면 ‘공개공간 활용’이다. 반공협의 핵심인자인 안병옥의 공문연 ‘파견 근무’의 효과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친정이 가까이 있으면 시집 살림을 빼돌리기도 한결 쉽지 않은가.
반공협의 공문연 접수(?) 작전은 최열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똑같은 일을 놓고도 보는 입장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최열에게는 안병옥이 끌고온 반공협이 천군만마였다. 그동안 반공협 회원들이 공문연 자원활동가 역할을 해왔지만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 공간에 들어왔다. 그것도 제 발로…. 거꾸로 공문연이 반공협을 공짜로 ‘접수’한 것 아닌가.
반공협은 1980년대 대학가를 지배한 학생운동의 한 지류였다. 이공대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반공해’라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주류 학생운동권과 비슷했다. 반정부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주류와 같이 호흡하려면 공해문제가 아니더라도 운동권이 관심을 갖는 온갖 시국사건에 참여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1987년은 대형 시국 현안이 연쇄 폭발한 시기이다. 반공협은 본업보다 이런 집회·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우선 운동권 내에 반공해운동의 존재를 알리고, 위치를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스스로를 단련하는 효과였다. 일종의 현장실습이자 전투훈련이다. 그래서 시위 때면 ‘반공해운동협의회’의 이름을 건 플래카드를 들고 일부러 맨 앞자리에 서곤 했다.
충분히 의식화되지도, 단련되지도 않은 인자들로 구성된 반공협 회원들의 이런 활동이 뒷날 본격적인 반공해 투쟁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워낙 인자가 부족하다 보니 집회·시위에 참여할 때 회원의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여자친구, 심지어 애인까지 동원해야 했다.
1980년 5월 이후 첫 대규모 격렬 시위였던 1986년 5·3인천사태 때의 일이다. 반공협에서 나간 시위대 중에는 회원의 친구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 여학생은 운동권 정서에 둔감했다. 데모하러 나오면서도 옷맵시에 신경을 더 썼고,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들뜬 모습이었다. 반공협의 온산병 실태조사 때는 샤워시설이 없는 민박집에서 묵으면서 온갖 법석을 떨어 기어이 혼자 샤워를 한 일도 있었다.
그 여학생은 그날도 치마를 ‘빼입고’ 나왔다. 게다가 우유와 떡볶이까지 준비했다. 물론 반공협은 의도적으로 맨 앞자리로 갔다. 집회 때 선두에 위치하면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식순에 따라야 했다. 몇 차례 그런 과정을 거쳐 지휘부의 착석 지시가 떨어졌다. 마침내 떡볶이를 나눠먹을 기회가 온 것이다. 이런 데서 먹는 떡볶이는 정말이지 꿀맛이다.
군중을 해산하는 경찰 입장에서는 이때가 기회다. 경험자는 이런 때를 경계한다. 이를 알 리 없는 그 여학생이 방심하는 사이 최루탄이 발사되면서 경찰의 작전이 개시됐다. 운도 나빴다. 최루탄 하나가 바로 그 여학생 머리 위에서 터졌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최루탄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말았으니….
‘아니, 이 냄새는?’
반쯤 누운 자세로 상념에 빠져 있던 최열은 코를 시큰거렸다. 도심의 한낮은 평온한데 웬 최루탄 냄새인가. 잠시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다시 펴졌다. 오늘은 큰 시위가 없는 날이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잠시 스쳤다.
이 무렵 공문연 사무실의 대각선 쪽 화장실 안에는 안병옥이 눈물·콧물·땀방울을 펑펑 쏟아내며 뭔가와 열심히 씨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사과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난 것인지 불발탄 하나를 가져와 해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열이 맡은 최루탄 냄새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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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정국발 최루탄 위해성 논란
1987년 전반기 정국은 ‘최루탄 정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최고 정치 이슈가 민주화라면 국민 생활과 관련해 가장 뜨거운 이슈는 최루탄이었다. 6월민주항쟁의 클라이맥스인 6·26평화대행진의 또 다른 이름이 ‘최루탄추방대회’였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최루탄’하면 최열이 빠질 수 없다. 바로 공해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최루탄 공해’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선 때는 5·3인천사태 직후부터였다. 집회장에 갔다가 최루탄을 원 없이 마신 그는 외부강연 아이템으로 최루탄 공해 문제를 추가했다. 특히 여자대학 강연은 이렇게 시작했다.
“최근에 생리가 안 나오는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다들 눈만 멀뚱거린다. 손을 드는 여학생은 아무도 없다. 최열은 최루탄의 성분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최루탄에 많이 함유돼 있는 것이 브롬(Br)이다. 브롬이라는 물질은 여성의 생식기능을 마비·저하시키고 생리불순, 생리정지현상 어쩌고저쩌고….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최루탄을 많이 마시면 불임이 된다”는 얘기는 여학생들에게 큰 충격이다. 한참 최루탄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한 뒤에 그가 다시 말한다.
“부끄러워 말고 생리가 안 나오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세요.”
약간의 술렁거림…. 한 학생이 용기를 내서 손을 든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손을 들고 마침내는 우르르 한꺼번에 따라 한다. “어디를 가나 절반 이상이 손을 들었다”는 게 최열의 최근 회고다.
1987년 직선제 개헌정국에서 일반적인 공해문제는 약발이 먹힐 리 없다. 자칫 한가한 얘기가 돼버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루탄은 공문연을 비롯한 반공해운동 진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 1987년 5월 22일 오후 5시 인천 주안5동성당 사제실에서 열린 공문연 정기이사회 회의록을 잠시 들여다보면….
“최루탄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슈화해야 합니다.”(이길재 이사)
“최루탄은 전쟁 화학무기니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찰을 향해 국민이 얘기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합니다. 최루탄 성분을 분석해봅시다.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 하고, 농약의 독성과 대비하고, 최루탄 공장이 어디에 있으며 생산량과 소비량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봅시다.”(성내운 이사)
“소책자 작업을 추진하고 슬라이드를 잘 만들어서 널리 확산시킵시다. 임인덕 신부님께서 최열·임진택 선생과 상의해서 비디오·슬라이드를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정호경 이사장)
최루탄 문제와 관련한 공문연의 전략은 이를 ‘공해문제’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론이 성분 분석과 소책자 제작·배포 작업이었다. 안병옥이 불발탄을 갖고 화장실에 들어간 것은 성분 분석에 쓸 최루탄 분말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최열은 안병옥에게 이 일을 맡겼고, 안병옥은 반공협 회원들과 함께 최루탄 분말 채취 작전을 실행했다. 다음은 안병옥의 최근 회고.
“외국 문헌에 최루탄이 인체에 해롭다는 보도가 있어서 우리가 성분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누군가가 불발탄을 주워왔는데 사과탄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핀을 돌리고 뚜껑을 열면 분말이 나온다고 해서 내가 했다. 들어갈 때 굉장히 긴장했는데 별 탈 없이 분말을 채취했다. 그런데 최루탄 냄새가 건물 안에 퍼져 각 사무실에서 난리가 났다. 그 때문에 최열 대표가 건물주한테 꽤 시달린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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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취한 분말은 고무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잘라 그 속에 넣어 밀봉했다. 그것을 다시 속을 파낸 백과사전 안에 감췄다. 이렇게 위장해 미국의 연구기관에 보낸다는 게 공문연의 계획이었다. 당시 국내에 사용된 최루탄의 종류는 KM25(일명 사과탄), SY44(일명 직격탄), 다연발탄(일명 지랄탄), 페퍼포그 등 네 가지였다. 이들은 최루성이 강한 CS탄 계열로서 염소·브롬화합물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었으나 다른 첨가물의 성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 알 수 없었다.
공문연의 생각은 국내에서 사용되는 최루탄이 시위해산용이 아니라 군사용 또는 폭동진압용이라는 것이었다. 성분 분석을 통해 이를 입증, 국민에게 널리 알린다는 게 공문연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이 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최열의 기억을 더듬으면….
“미국 MIT가 유명해 그쪽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했다. 얼마 후 결과가 나왔는데 매우 실망스러웠다. 우리가 다 아는 성분만 나온 것이다. 그쪽으로 보낸 게 실수였다. 최루탄의 원료는 삼영화학이 미국에서 주로 수입했다. 자기 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화학물질을 우리에게 얘기해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긴 했어도 공문연의 ‘최루탄 싸움’은 대성공을 거둔다. 성분 분석 결과는 써먹지 못하지만 안병옥이 주도해서 만든 소책자가 대박을 터뜨리기 때문이다. 당시 길거리 베스트셀러가 된 ‘피눈물 흘리는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최루탄! 그 죽음의 옷을 벗긴다’라는 자극적인 부제가 붙은 이 소책자는 각종 집회·시위 현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가격은 500원이었고, “3만부가 팔렸다”는 게 최열의 최근 회고다.
시위 현장에서 뜬 베스트셀러
최루탄의 역사, 부작용, 많이 사용하는 나라, 소비량과 민중탄압의 함수관계, 이한열 등 최루탄 희생자, 최루탄 재벌 등 딱딱한 내용을 담은 이 책자가 히트를 한 데는 그 이유가 있을 법하다. 사진, 그림, 만화, 퍼즐 등 젊은 감각에 맞는 아기자기한 팁들을 포함한 것이 그중 하나일 듯하다. 항의전화를 할 수 있도록 최루탄 제작회사와 남용 책임이 있는 관공서의 전화번호를 넣고 최루탄 예방제를 소개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도 엿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이 소책자의 발행처가 공문연 단독이 아니라 공청협과 공동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발행 시기가 1987년 7월 쯤이니까 공청협이 공식 출범하기 약 3개월 전이다. 그동안 반공협이 한 일을 대외적으로는 공문연 이름으로 내보낸 사실을 감안하면 이 책자가 반공협의 첫 공식 작품인 셈이다. 그것도 공청협이라는 이름으로….
공청협은 1984년부터 활동해온 반공협이 1987년 ‘오픈’한 조직이라고 보면 된다. 비공개단체가 공개단체화하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공협=공청협이라는 얘기다.
환경운동사에서 공청협이 중요한 까닭은 이 조직이 공문연의 최열을 업고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더 나아가 환경운동연합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공해연구회의 조중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환경전문기자) 등도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주었다. 즉 지금의 환경운동권의 가장 강력한 뿌리 조직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1987년 10월 10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공청협의 주축은 안병옥을 비롯해 윤제용(현 서울대 교수)·김근배(현 전북대 교수)·박상철(현 한영회계법인 공인회계사, 환경운동연합 감사)·이성실(자연그림책 작가, 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저소생물분과 실행위원) 등 반공협 시절부터 활동한 그룹이다. 여기에 새로 가세한 주요 인물이 황상규(현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전문위원)와 최예용(현 시민환경연구소 기획실장)이다.
황상규의 공청협 참여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과학기술운동이나 그 지류인 반공해운동 멤버가 아니라 학생운동권 주류에 있던 스타급 인물이기 때문이다. 부산 성도고 출신으로 서울대 공대 공업화학과(지금의 응용생물과학부) 83학번인 그는 비공개·공개 파트 활동을 두루 거쳤고 학내 사건으로 실형까지 사는 등 전력이 화려했다.
1~2학년 시절 언더에 있던 그가 오픈 공간으로 나온 것은 학생운동 전반이 학생회를 중심으로 공개활동을 지향하기로 한 1985년이었다. 그는 자연대의 김세진(1986년 분신 사망)과 사회대의 이재호(1986년 분신 사망) 등과 함께 단과대 학생회 준비 작업을 벌였고, 자신은 공대를 맡았다.
1986년 신학기에 공대 학생회 구성하면서 그는 경쟁자인 장유식(현 변호사)과 역할 분담을 약속했다. 선거에 지는 사람이 총무부장을 맡기로 한 것이다. 장유식이 당선되자 그는 약속대로 총무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구속되고 김세진·이재호가 ‘열사’로 산화하는 격동의 국면은 바로 그 직후에 펼쳐진다. 그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파워맨’ 황상규의 진로 결정
“자민투·민민투가 나오고 개헌문제까지 얽혀 복잡한 정국이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자민투 계열의 반전·반핵, 팀스피리트 반대가 이슈로 부각할 때 내가 공개 파트를 맡았다. 3월 하순에 구속된 것이 그 때문이다. 정권의 대응 수위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학내에 유인물을 배포했더니 국가보안법으로 걸었다. 정권이 초강경 대응으로 나오자 다들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하고는….”
그가 구속된 지 약 한 달 뒤에 벌어진 사건은 엄청났다. 4월 28일 김세진·이재호의 분신은 그로서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 이상이었다. 그 자신이 두 친구가 몸을 불사르며 외친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의 메신저였기 했기 때문이다.
자민투·민민투는 1986년 봄 서울대를 중심으로 분화된 학생운동권의 분파다. 자민투는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의 약자로서 반제민족민주혁명을 위해 반미·반제를 우선적 투쟁과제로 삼고 있었다. 민민투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의 약자로 파쇼타도를 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다. 자민투는 NL(민족해방), 민민투는 PD(민중민주) 계열이라고 보면 된다.
공청협을 이런 주류 학생운동권의 잣대로 잰다면 NL보다 PD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공해문제는 독점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 반공해운동권의 일반적 시각이었던 만큼 반미자주화 계열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황상규가 공청협에 참여한 것은 소신을 바꾼 것이 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안병옥의 얘기를 들어보면….
“김세진·이재호는 반미자주화운동의 선상에서 분신했다. 이런 노선과 반공해운동의 그것은 달랐지만 한 가지 접점이 있었다. 바로 반전·반핵이다. (반미자주화 노선과 반공해운동이) 서로 접근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이 부분에서 일치했던 것이다.”
1년 반 남짓 복역하고 1987년 7월 출소한 황상규는 고민 끝에 반전·반핵·평화·공해운동으로 자신의 진로를 잡았다. 사실 그는 반공협이 낯선 곳이 아니었다. 대학 1학년 때 ‘공해의 정치경제학’(츠르 시게토, 풀빛, 1983년)을 읽고 환경문제에 눈을 떴고, 2학년 때 반공협에 참여한 바 있었다. 3학년 때인 1985년에는 아예 휴학을 하고 온산 공해 현장으로 ‘이전’을 시도했고, 그해 말에는 수질환경기사 1급 자격증까지 땄다.
또 한 명의 ‘파워맨’이 등장하면서 반공협의 오픈 작업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 무렵 반공해운동도 최루탄 정국의 긴 터널을 벗어나 대선정국으로 급전하게 되는데….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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