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그가 말했다.
실상 둘은 그 사건에서는 하나였으므로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가,
그의 이갸기 속에서는 그녀가 말하고 표정지으며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음소거의 상태인 것들의 부산함.
하여 내가 들은 그녀/그의 그녀-그의 이야기는,
비록 한사람이 내게 들려준 것이었지만 이미 다채널로 녹음
혹은 기억된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재생 할 때,
채널들의 발랜스를 맞추거나 이큘라이저를 조작하거나 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그녀/그가 들려준 것이었으나
그녀/그의 목소리는 지워지거나 희미해지기도 하고,
그녀/그에 의해 지워지거나 늘어진 소리들이
환청 대역에서 라이브로 들려오기도 한다.
내가 굳이
타인들 사이의 관계가 써내려간 자전적 이야기들 속에 깃든
그 무음과 잡음의 세계로 "탐험"을 떠날 때는,
대체로 화자들이 그녀/그사이의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잘 들어", "놀라지 마", "화내지 마" 등등의 "최적환경"을 미리 제안하거나,
"솔직히" "사실을 말하자면"과 같은 말로 베이스를 극대화 한 채,
"MONO-logue" 로 말할 때다.
그럴 때면 대체로,
나는 내 귀나 머리 혹은 가슴을 세팅하기 보다는,
얼굴 근육을 긴장시켜 표정관리 준비를 하는데 더 급급해 질 뿐이다.
하지만 때론,
사랑의 거친 파도 혹은 지하수로 흘러 든 뜨거움이,
단단한 바위 위에 주름을 만들고,
어느날 지나가는 물소리에
때론 흘러가는 바람소리를 붙잡고
주름선들을 튕겨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그 독특한 음색에 몰입하게 되는 어떤 경향이 있다.
타인들의 사랑은 나의 그것 보다 항상 경외롭다.
그래서일까?
어떤이는 그 공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어떤이는 귓구멍을 후비며 딴청을 부리거나,
숨소리를 죽이며 경건한 체 하고..
또 편집증적인 어떤이는 "스크랩"을 하거나,
실시간 디지털 인코딩으로 머리라는 외부 기억장치나 가슴이란 메인보드에 분산 저장하기도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지 않고..않고..않고..
않해야 하고.. 하고.. 하고..
하고 싶고 싶고 싶고..
...
그렇게
타인의 이야기가 만들어낸 주름을 스스로에게 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